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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제정 노동주일 기념 제3회 공모전 설교문 부문 당선작] 정한나 "'대체불가능성'이라는 오래된 약속에 대하여"(출1:8~16)

Author
영등포산업선교회
Date
2023-04-07 14:38
Views
305




정한나 "'대체불가능성'이라는 오래된 약속에 대하여"(출1:8~16)

[작성 취지 및 주제]

제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라는 전지구적 사건들이 맞부딪혀 만들어 낸 급류는 “당신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위협으로 노동 및 존재의 가치를 평가절하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바라보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이자 소명으로서의 노동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노동자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본문]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지난했던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잘 꺼내지지 않는 인사가 생겼습니다. 바로 “평안하십니까?”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 말이 자칫 무심하고 태평한 말로 곡해될까 걱정될 정도로, 우리의 일상과는 다소 격차가 있는 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평안하냐’라는 질문은 십중팔구 전혀 안녕하지 못한 상황에서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개역개정에서 이 ‘평안하냐’라는 말은 (1) 야곱이 형의 살의를 피해서 외삼촌 네 동네까지 도망친 후에, 과연 이곳은 내가 발을 뻗을만한 상황이긴 할지를 가늠해 보려고 던진 질문이었고, (2) 멀쩡하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품 안에서 숨을 거둔 상황에서, 말 못 할 심정을 안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달려왔던 여인에게 던져진 질문이었으며, (3) 우상숭배와 폭정을 멈추겠노라 결심한 예후에게, 상황 파악 못한 요람과 그의 어머니 이세벨이 던진 질문이었지요. 그리고 (4)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던지신 문안인사였기도 합니다. 무엇 하나 속 편히 해맑게 “네, 잘 지냅니다”할 상황들이 아니었지요.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일터는 안녕하십니까? 지금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로 인한 가속화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경제 위기 때와 달리, 이번 코로나19 때 노동시장에 새로 등장한 특징이 있다는 것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예전에는 경제 위기가 닥치면 남성 노동자들의 고용 감소가 두드러졌습니다.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남성이 주로 직장 생활을 해왔던 사회 상황도 반영이 되었겠지요. 그런데 이번 코로나 시기에는 여성의 고용 감소가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성 종사자 비율이 높은 제조업이나 건설업 등의 분야보다도, 여성 노동자들의 고용비율이 높은 서비스업이 가장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가장 실직률이 높았던 그룹은 자녀를 둔 기혼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부담이 높아진 상황에서, 정부의 돌봄 정책이 영유아같이 특정 분야에 집중되어 있던 터에 상대적으로 초등생 자녀들을 둔 부모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미비했던 것이, 부부간의 임금 격차나 직군 간의 차이 등 여타의 요건들과 맞물려서 빚어진 결과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니,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나날이 경색되는 경제와 높아지는 물가, 그리고 그저 숨만 쉬고 있어도 다달이 빠져나가는 임대료와 제반 비용 등으로 인해 결국 폐업하게 된 수많은 자영업자 분들도 계시지요. 이렇게 실업이나 취업 준비, 재택근무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한 가족들이 집이라는 한 공간 안에 함께 갇히게 되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우울증까지도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심지어 가상 인간 인플루언서, 논문까지 척척 써내고 예술작품까지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인공지능, 요리하고 서빙하는 각종 로봇 등, 인력을 대체할 만한 신기술들은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시장의 판도를 가파르게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정작 그에 따른 대책 논의는 너무나도 지지부진한데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안하십니까?’라는 문안이 어찌 쉬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 본문에도 평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새 통치자가 이집트의 군주로 등극했고, 이 파라오는 제국 내에 존재하는 외국인들 중에 꽤 큰 세력을 구축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총 두 가지의 방책을 냅니다. 하나는 ‘과중한 강제 노역’이고, 다른 하나는 ‘산아제한’이었습니다. 그가 히브리 견제정책 펼친 근거는 ‘장차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지도 모를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제국의 구성원을 그의 백성, 즉 파라오 자신의 백성과 이스라엘인으로 가르고, 전자에게 후자에 대한 불안감을 갖도록 종용합니다. 그리고 이 사회적 불안을 미리 해소하는 동시에 대내외적 내실을 다지는 데에 그가 착취한 노동력을 활용합니다. 주지육림을 만들거나, 내실 없는 정책을 세우는 대신에, 각종 유사시에 대한 방비가 가능한 국고성들을 축조하도록 했다는 점도 파라오의 정치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따금씩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는 하지요. 파라오의 예상과 달리, ‘학대’ 수준의 노동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들의 세력은 계속 불어납니다. 사회적 상위계층으로 분류된 이집트 본토인들이 불편감을 넘어서 위협감을 느낄 정도로 말입니다. 위기감이 확산되자, 그들은 파라오의 직접적인 지시 없이도 하위 집단에 대한 억압과 학대를 가중시킵니다. 파라오가 의도한 ‘분리’가 한 집단의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킨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파라오는 하나의 수를 더 둡니다. 바로 ‘산아제한’ 정책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인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이것 외에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말살정책을 공격적으로 감행하는 대신, 은밀한 접근법을 택합니다. 평소라면 일평생 마주할 일 없었을 산파들을 직접 부른 후, 밀령을 내립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출산한 아기가 사내아기라면 해산 시에 바로 죽여라!” 산파 외에는 이것이 인재(人災)라는 것을 알 사람이 없고, 눈치챌 만한 시점에서는 이미 때가 늦은 상황일 테니, 불필요한 반발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만한 계책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변수가 발생합니다. 눈에 보이는 신적인 절대권력자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한 산파들이 파라오의 꼼수에 꼼수로 대응하며 그의 명령에 불응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라오는 은밀히 시행하려던 이 정책을 수면 위로 올려서,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인들이 사내아기를 출산하면 그 아기를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게 됩니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펼쳤던 정책들이 공략했던 두 가지 핵심 지점을 보십시오. ‘노동’과 ‘출산’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밖으로 내치시기에 앞서 그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징벌을 언급하실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두 부분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형벌로써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질서 속에 있었던 것임을 유의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이때 ‘경작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아바드’라는 동사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일하다, 다스리다, 밭을 갈다, 봉사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지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좌마르’라는 동사를 번역한 것으로, 이는 ‘돌보다, 보호하다, 감시하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즉, 에덴은 애당초 인간의 무위도식을 위해 지어진 공간이 아니었으며, 노동은 애초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해 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설명합니다. 창세기 3장 16절의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겠다라는 표현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출애굽 사건의 시발점이었던 파라오의 이 두 가지 정책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도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과 경고를 무시한 결과, 노동과 출산의 고통과 수고가 크게 더해졌을지라도, 이 두 가지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축복 어린 명령이었습니다. 심지어 에덴을 벗어난 후에도, 노동이란 여전히 자신과 가족들의 생을 이어가기 위한 가치 있는 수고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파라오와, 그로 대변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질서’는, 노동을 통제의 수단으로 변질시키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가 노동자 자신이 아니라 타자에게 돌아가도록 뒤틀어버립니다. 이것이 비단 출애굽이라는 서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설정된 극적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요?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에서 학교폭력을 주도하는 캐릭터가,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난 꿈이 없지, 동은아. 꿈은 너네가 갖는 거지. 난 너네가 꿈 이루면 돈 주고 부리는 거고.” 이 대사는, 생계를 위해, 자아실현을 위해, 이상을 위해, 소명을 위해 땀 흘리는 모든 이들의 노력과 삶을 단번에 ‘돈과 권력이 없기 때문에 하는 비루한 것’으로 평가절하해버립니다. 주어진 과업에 최선의 성과를 낸다 한들 “뭐 그리 대단한 걸 했다고 생색이냐”는 비아냥거림과, “이 정도도 못 해낼 거면 그만둬. 대신하겠다는 사람들 많으니까 괜히 자리 차지하지 말고 언제든지 나가시라고”라는 협박은, 직군을 막론하고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합니다. 그 목소리들이 귀결되는 지점은 하나입니다. “너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여전히 노동의 본의를 뒤틀고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이 위협이 무의식 속에서 여러분을 통제하고 있었음이 자각되신다면, 이 시간 멈춰 서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때때로 엇나갈지언정 다시 정신을 차릴 때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마다 하나님께 여쭤보고 인도하심을 구하며 결정을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여러분께서 서 계신 삶의 자리도, 일터와 직장도 그렇게 결정해서 도착한 중간 도착지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혹시 평안하지 못하시다면, 이 시간,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있어도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시는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이 이 땅 위에 임하도록 믿음으로 일구어 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세상의 조롱이 여러분의 영혼을 갉아먹고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고, 다시 마음의 푯대를 바로 세웁시다.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하며 걸어오신 끝에 도착해 계시는 바로 그 자리가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위와 같은 하나님의 시선이 아직 통용되지 않는다면, 그 자리를 바꿔가시기를, 그렇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의 소리에 마주 울리는 공명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여러분을 통하여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