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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총회노동주일 공모전 설교문 부문 당선작 발표] 김주역 "다시 삶으로 나아갑니다" (요21:3)

Author
영등포산업선교회
Date
2022-04-14 13:49
Views
111




김주역

"다시 삶으로 나아갑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

[작성취지와 주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과, 성도들의 삶이 크게 분리되어 있다. 이는 교회가 세상을 악으로, 교회를 선으로 구분 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17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나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살아내는 노동의 현장에 있다는 것을 전하려 합니다.

[본문]

우리는 교회에 나올 때 어떤 것을 기대하고 나아올까요? 한 주간 삶 속에서 상처 받고 힘들었던 내 자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힘들고 지친 자들에게 나아오면 쉬게 해 주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달리 삶과 인생은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참 좋은데. 좋은 사람들만 있는데 왜 세상에는, 어째서 선한 것이 이렇게 하나도 없을까요? 주일날 드리는 예배 한번이 이렇게 은혜롭고 좋은데. 하다못해 억지로 드리는 예배일지라도 은혜가 되는데. 일주일에 5일 이상 일을 하는 것은 이리도 힘들어야만 할까요. 교회가 좋아지는 만큼 세상이 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상처받는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을 겁니다. 서로 속이고 미워할 수도 있구요. 일주일을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살다가 교회로 오면 평안함을 느끼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예배가 끝이 납니다. 즐거운 찬양과 은혜로운 설교. 평화로운 성도와의 교제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교회 문 밖에 꽉 막힌 도로. 그리고 다가오는 월요일의 출근 시간일 것입니다. 은퇴를 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다를 것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을 성실히 감당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끼다 다시 세상에 던져질 때, 그 감정을 감히 설명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세상이 더 이상 괴롭기만 한 곳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한 희생의 노동은 이제 자아실현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꿈과 희망을 현실에 구현해 나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워라벨을 통해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인생의 행복을 그려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쪼개진 시간을 모아 담아 먹고 살아야 하는 불안전한 일자리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공동체로써의 인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일자리로 쪼개져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에는 변화하는 노동이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공무원은 청년층에게 매력적인 일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공무원 경쟁률마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적은 임금과 강도 높은 정신노동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노아의 방주처럼, 힘든 세상과 유혹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흩으셨던 예수님처럼 세상에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도를 할 때만 세상에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시 삶으로 나아갑니다. 3년간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며 같이 먹고 잔 이들은 그들의 본업으로 돌아갑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한 3년은 정말 황홀했을 것입니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기적을 보기도 하고 직접 행하기도 했습니다. 존경받는 스승님의 멋있는 모습과 함께 변화되어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은 끝이 난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다시 월요일의 삶으로 돌아갈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절망해서, 그리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처음에 낚시하던 베드로를 부른 장면과 오늘 본문에서의 장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곳이 우리의 삶의 자리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리 마태는 세금을 징수하던 때, 나다나엘은 친구와의 대화 중, 다른 제자들과 군중 들 모두 회당보다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며 어디서나 말씀하신다는 범재하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디서 주님을 찾아야 할지, 그리고 전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의 자리에서 노동은 소중합니다. 베드로는 성실하게 어업을 했습니다. 물론 삶의 순간이, 모든 노동이 결과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물고기를 하루 종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편에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믿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넘어서 일하는 자에게 임하시는 노동의 주님이라는 감동을 모든 사람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많은 물고기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마리를 거두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물고기를 좀, 조금, 몇 마리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각각 개역개정, 새번역, 공동번역).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루 종일 고생한 제자들에게 물고기와 떡을 주셨습니다. 노동한 그들에게 안식과 쉼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동으로 고생한 여러분에게 주님께서는 안식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저 싫은 것으로만, 견뎌야 하는 짐으로만 생각한다면 다시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주님의 징벌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때에 마음가짐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였기에, 인생의 한 부분이며 나 자신이었기에 나아간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고 먹이라 하셨는데 (요21), 이것은 결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을 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기꺼이 하며 본이 되어야 합니다. (벧전5:2)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을 만나며, 전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닫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부인 그들은 물고기를 낚는 것이 그저 고통이었을 것이며, 삶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낚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그 때에도 다시 노동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전의 노동과는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거듭 났듯이 노동 역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각자의 노동 현장에서 양들을 먹이어라. 다시 오늘날의 노동현장으로 돌아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즐거운 노동보다는 고통의 노동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신 노동이 아닙니다. 애가서의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다”는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양들을 치는 것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고통받는 양들의 울음을 외면하지 않으며, 교회 밖의 세상에서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특별히 일하다 죽는 산업재해가 오늘날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듯이, 노동 역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무고한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배고프면 나도 배가 고파지고, 이웃이 추우면 우리도 추워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이웃 역시 주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노동주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노동. 그 노동 속에서 우리 자신과 주변 이웃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노동을 묵상하며,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웃의 노동에 영적인 민감함으로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여러분의 곁에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시며 힘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