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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총회노동주일 공모전 설교문 부문 당선작 발표] 김윤동 "오늘도 투쟁하시는 하나님" (출14:11-14)

Author
영등포산업선교회
Date
2022-04-14 13:41
Views
526




김윤동

"오늘도 투쟁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4장 11-14절)

[작성취지와 주제]

지금도 이 세계는 성별과 인종, 나이와 민족, 성적 지향 등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가 진 존재라면 모두 생과 사의 전선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통 과 신음을 그저 일어나야하는 일, 자연스러운 일,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로 여기지 않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그 모든 것을 노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든 노동의 현장 곳곳에서 가장 앞장서서, 그리고 각각의 노동 분투 하고 투쟁하는 분이십니다. 이 설교문은 오늘도 싸우고 있는 하나님과 그의 싸움을 증언하고, 나아가 힘겹게 버티고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싸움을 지속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를 불어넣고자 합니다.

[본문]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성서를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민족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여러 이름, 여러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름 또는 이미지는 어떨 때엔 서로 충돌하여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종국적으로 그 수많은 하나님에 관한 은유들은 하나님을 단일하고 단조롭게 이해하는 것을 막고,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다양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요즘 가장 받아들이고 싶은 하나님은 어 떤 분이십니까? 인자하고 자비가 많고 모든 것을 아우르며, 포용하는 분입니까? 요즘 은 그런 하나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세계적으로 발발한 큰 전쟁이 워낙 큰 이슈라서 그럴까요. 어떤 것도 차별하지 않고, 어떤 폭력도 존재하지 않도록 중재하는 ‘온건한’ 하나님이 요즘은 더 절실하게 호명되는 하나님의 이미지인 것 같습니다.

한데, 그와 조금은 대비되는 하나님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바로 싸움꾼 하나님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훼는 고대 근동사회에서 전쟁을 주관하는 광야의 떠돌이 신 이었습니다. 안정된 땅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는 농사를 잘 되게 하 여 풍요를 주는 신, 자손을 많이 낳게 하여 번성하게 하는 신이 더 중요합니다만, 유대인들을 선택하고 계약을 맺은 야훼라는 신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고, 아주 호전적(好戰的)인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야훼라는 신은 유난히 배타적이고 질투가 많습니다. 자기 말고 다 른 신을 섬기는 것에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로 유명합니다. 신명기에서 유대인들 과 첫 계약을 맺을 때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 5:6~7)

요즘 그런데 이런 ‘야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구시대 적인 발상이라고 욕먹기 딱 좋습니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하나님 이미지는 여러 종교가 상호 존중하고 공존해야 하는 종교적 상황을 비롯해 개 인의 인권과 다양성이 존중 받아야 하는 현대 사회적 상황에서는 시효가 만료된 이름 이며, 될 수 있으면 언급하지 말고 꽁꽁 숨겨두어야 할 이미지라 평가 받기도 합니다.

허나, 엄연히 따지자면 그것은 그런 성서 구절과 배타적인 하나님 이미지를 차별과 혐오의 정치적인 선전의 구호로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뿐이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내내 밤이고 낮이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우시는 하나님에게 그 책 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서의 첫 구절인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순 간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새 창조’(계 21:1) 사 이 내내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는 하나님을 편견으로부터 구출하고 또 새롭게 오늘 의 현실에 적합하게 발굴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왜 그렇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성서의 이 야기 내내 그렇게 싸워야만 했을까요? 또한 그런 ‘싸움꾼’ 하나님은 오늘 노동과 노동자들의 현실에 어떤 새로운 영감과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서의 많은 스토리를 통해 ‘싸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굴해낼 수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출애굽기 14장의 본문을 통해 이 세상의 사건에 개입하며, 투쟁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창세기에서 그려진 하나님은 창조 직후에 본인이 공 들여 만든 온 세상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설계와 창조행위가 완벽했을지 몰라도 이 세계가 처음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 대해 실망한 듯합니다. 자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여 이 세상을 함께 가꾸어나가자고 만든 인간은 나자마자 서로를 죽였고 하나님은 낙원으로부터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인간과 뭇생명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였지만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 하고 반목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러한 인간과 세계에 출애굽기 2장에서 하나님이 개입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출 2:23) 여기에서 하나님에게는 ‘싸우지 않을’ 또는 ‘상대 적으로 덜 싸울’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는 바로와 직접 대면하여 덜 싸우고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를 설득하긴 했지만, 거의 강압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돌려 놓으셨다면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아도 됐을텐데요.

혹은 안정적으로 자기와 말 잘 통하고 권력도 있고 교양도 있고 역량도 있는 폼나는 지배층의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소소한 문제는 있었을지라도 당시의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개입하셨다면 이후의 큰 피는 흘리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예 싸우지 않을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니까 논리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저지른 것뿐인데 내가 거기에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처음에 이 세계를 만들 때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니 이제 인간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인간들이 알아서 하게 둬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아예 개입하지 않아도 됐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서에서는 똑똑히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 입니다. 하나님은 싸우지 않아도 괜찮고, 덜 싸울 수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부러 어려운 싸움을 택했습니다. 게다가 말도 듣지 않고, 뒤쫓아오는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며 여기서 이렇게 죽음을 당할 바에야 애굽에서 편안하게 매장되어 죽는 게 낫겠다는 잔인한 원망만 하루 종일 늘어놓는 노예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저는 오늘 14장 13절과 14절에 나와 있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서 이 싸움의 어렴풋한 실마리를 찾습니다. 이 싸움은 지금 하나님 자신의 싸움이지, 결코 인간들의 어떤 다툼에 대한 중재행위가 아니라는 말로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지 금 히브리인들을 선택하여 이끌고 나온 행위는 노예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노예가 약 자여서도 아니고, 노예의 계급혁명을 돕기 위해서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마치 링 위에 서 있는 외로운 싸움꾼을 보았습니다. 그는 본래가 싸움꾼이었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싸움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존 재 이유기 때문에 싸우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어쩌면 백성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지금 홍해 앞에서의 이 절체절명의 순간은 오지 않았을 겁니다. 노역은 고되었겠지만, 보장된 일상이 있었습니다. 일정한 루틴이 있어서 미래가 예측되는 삶이었을 것이고, ‘소소하 고 확실한 행복’이 노예들의 삶에는 존재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끼어든 것입니다. 몇 마디 푸념으로 해달라고 했더니 정말 이루어주는 신이 세상에 있을 줄 은 노예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몰랐을 겁니다. 그들에게 신은 ‘환상’이었지, ‘현실’은 아니었을 것이고, 속마음 깊은 곳에서는 실제로 그런 구원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보란 듯이 히브리인들은 이후에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키는 광경을 봤으면서도, 광야생활 40년동안도 원망을 이어가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데, 거기에 실제로 하나님이 끼어들었습니다. 즉, 이 싸움은 엄연히 따져서 약자 인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싸움이란 필연적이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본질이 ‘싸우고 투쟁하시는 분’이라는 이야 기입니다. 없던 세상을 하나님은 ‘공을 들여’ 만들었습니다. 그래야 ‘있게 되기’때문이 죠. 스스로는 싫다고 하던 그 하나님의 백성을 밤낮으로 애쓰고 어르고 달래어 만들 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증명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그저 우주 어딘가에 홀로 고고하게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정적인 ‘물질’이 아니라 물질들과 물질들 사이에 던져진 불입니다. 하나님은 그것 홀로는 결코 의미가 없던 개개의 것들을 영차영차 이끌어다가 마침내 연결짓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고 늘 싸움의 결과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싸움의 일시적 인 승리와 패배는 완결적이지 않고 잠정적입니다. 한 때는 승리일지 모르나, 그 결과 에 도취되어 후에 크게 패배할 수 있고, 일시적인 패배일지 모르나, 그것이 거름이 되고 씨앗이 되어 더 큰 승리를 성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싸움이 본 질이고, 싸우는 자체가 존재증명인 하나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싸울 뿐, 그저 오늘의 결과에 매몰되거나 도취되지 않고 받아들이고 또 싸우고 또 이겨낼 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애쓰고 노동하며, 투쟁하고 삶의 전선에서 오가는 여러분, 그리고 노동을 특별히 앞장서서 운동으로 펼치고 있는 활동가 여러분, 가장 먼저는 가만히 서서 하 나님의 투쟁을 보시기 바랍니다. 뒤쫓아오는 빚과 가난의 병거를 잠깐은 쳐다보지 말 고, 가만히 하나님의 투쟁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지금도 보이는 곳과 보이 지 않는 모든 곳, 나와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하나님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의 투쟁 중 여러분의 오늘 하루 일어나는 생사고락 또한 그 일부이니 용기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동등한 크기, 아니 그것보다 훨씬 크게 분투하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세상의 창조를 쟁취해낸 하나님은 창조 이후에도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계속적으로 투쟁을 이어가고 계시며 종국에는 첫 하늘, 첫 땅이 사라지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새 창조’를 만들어내실 우리의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