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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총회노동주일 공모전 설교문 부문 당선작 발표] 이명진 "능력주의와 공정의 맥락" (마20:1-16)

Author
영등포산업선교회
Date
2022-04-14 13:53
Views
422


이명진

"능력주의와 공정의 맥락" (마20:1-16)

[작성취지]

능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공정하다고 여기는 인식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교해본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이 인식하는 공정의 수준이 시대 흐름과는 달라야 함을 제언한다.

[본문]

마태복음 20장 1-16절은 능력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에 익숙한 한국 사회에서 정말 불편한 본문 입니다. 해당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의 여러 원리들을 설명하는 도중 한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1절에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말씀하시며 비유를 시작합니다. 이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2절에 품삯을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현재 우리시대 용어로 바꾸어 이해하면 고용주가 일용직 노동자들을 일당제로 고용한 형태가 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일당을 합의합니다. 신명기 24장 14절-15절을 보면 당시에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 규정에 대해 자세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14절 같은 겨레 가운데서나 당신들 땅 성문 안에 사는 외국사람 가운데서, 가난하여 품팔이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15절 그 날 품삯은 그 날로 주되, 해가 지기 전에 주어야 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날 품삯을 그 날 받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가 그 날 품삯을 못 받아, 당신들을 원망하면서 주님께 호소하면, 당신들에게 죄가 돌아갈 것입니다.

 

현대보다 인권 개념도 미흡하고, 노동법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대 근동문서에 이런 규정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지금 언어로 바꾸어 해석하면 가난한 이들과 이주민들을 억울하게 대하지 말고, 일당은 그들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재화이니 반드시 당일에 지급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주민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착취당하고, 내국인들에게도 임금체불이 잦은 지금의 한국사회에도 꼭 필요한 윤리입니다.

8절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당일에 임금을 지급하고 있으니 신명기 명령을 잘 지키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4절에 그 일당이 ‘적당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인은 첫 계약을 성사시키고 다시 장터에 나갑니다.

본문 3절에 ‘장터’가 처음 등장하는데, 당시 장터는 직업소개소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각주-1) 장터엔 오전 9시가 되도록 빈둥거리고 있는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지금껏 ‘빈둥거림, 놀고 있는’이란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기 쉽기 때문에, 그들을 평가할 때 일할 의지가 없는 이들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지 않고 장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 일할 의지가 없었다면 집에만 있었거나 주인이 일할 기회를 제안했을 때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러왔거나 장사를 하러 온 이들이면 굳이 일용직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하며 또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적당한’의 헬라어 원어는 마태복음에서만 총 14번 등장하는데, 마태복음 20장에서만 ‘적당한, 상당하게’로 번역하고, 나머지 본문은 모두 ‘의로운, 의로운 자, 의인, 의롭게, 의인들, 흠없고 공정한 상태, 정의로운 행위’ 등으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이 자신이 지급하는 품삯의 정도를 적당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결정이 공정하며 의롭고 정당하다며 자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주인은 열두시와 오후 세시, 그리고 일이 거의 끝나기 직전인 오후 다섯 시에도 장터에 나가 빈둥거리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주인이 장터에 일을 구하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아직도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냐며 물으니 장터에 있던 자들이 대답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 이러고 있다.” 이 대목에서 이들이 일할 의지가 있었음이 분명해집니다. 이들이 언제부터 장터에 나와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들은 일할 의지를 가지고 장터에 나와 있었고, 아무도 그들에게 일할 거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장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많은 노동자들이 일할 기회를 얻어 일을 했고, 저녁이 되어 임금을 지급할 시간이 됩니다. 일꾼들은 모두 똑같은 품삯을 받습니다. 가장 먼저 온 이들은 주인에게 항의합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와서 하루 종일 일하지 않았느냐고, 우리는 일찍 와서 종일 더운 곳에서 고생했는데 어떻게 저 사람들과 우리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냐고 따집니다. 얼핏 이들의 주장은 정당해보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느냐?”(13절) 그리고 주인은 마지막 사람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며 쐐기를 박아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끝마치시며 이와 같이 나중 된 이들이 먼저가 되고, 먼저 된 이들이 나중이 될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포도원 본문을 접할 때 자연스럽게 맨 처음 일하러 온 사람들에게 감정이 이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경쟁과 평가, 선착순에 익숙한 한국사회 분위기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부당함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 비유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기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주인과 맨 처음 일하러 나온 노동자들 간 계약에서 부당함은 없었는가?

포도원 주인은 맨 처음 일하러 나온 이들과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이른바 쌍무계약을 맺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주인은 그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일당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명기에 나타난 율법이 명시하는 바를 그대로 이행하고 있음을 앞서 확인했습니다. 또 해당 합의는 일당제로 이루어졌고 양측모두 서로의 채무 변제를 성실히 이행했으므로 당사자 간 계약의 성사나 이행 절차와 결과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을 성사시켰던 근간이 되는 신명기 본문 또한 불의하거나 잘못된 법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해당 합의 자체는 부당하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는 일꾼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본문에서 포도원 주인은 총 다섯 번 인력을 고용합니다. 아침부터 일을 시작한 노동자들과 오후 5시 마지막으로 일을 시작한 이들까지,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판단할만한 정보는 본문에 나온 몇 가지 단서와 예수님의 설명을 토대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서 분명히 알려주는 것은 그들이 장터에서 주인에게 고용되어 일을 시작한 시간입니다. 장터라는 인력시장 속에서 어떤 이들은 가장먼저 포도원 주인의 눈에 띄어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어떤 이들은 아무에게도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장터에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겐 모두 ‘일을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용직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 하루에 한 데나리온이 꼭 필요한, 부유하지 않은 계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요?

보통의 경우 육체노동을 요구하는 직업소개소와 같은 인력시장에서 기술이 있거나, 건강한 이들이 가장먼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장 늦게 일을 구하는 이들의 ‘빈둥거림’만을 가지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습니다. 6절에 포도원 주인이 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냐는 질문에 7절에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왜 남의 탓을 하는지, 당신들이 더 노력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식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으려는 부류인 이 사람들은 능력에 의해 평가받는 사회에 가장 나중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도 비유를 마칠 때 이들을 나중 된 이들이라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늦게 부름 받은 이들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밀려난, 사회 언저리에 있는 이들로 보아야 합니다.

셋째, 가장 먼저 일한 노동자들이 느끼는 부당함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이들이 불만을 갖는 이유는 포도원 주인이 정당한 계약이행을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단지 자신들보다 덜 일한 이들이 같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중 된 이들과 자신들을 ‘시간’이라는 하나의 단서만으로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들인지 고려해볼만한 수많은 맥락은 생각하지 않은 채 단지 하나의 기준만을 생각하며 주인에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호소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불만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만일 먼저 온 이들이 나중 온 이들의 더 많은 맥락을 고려했다면 쉽게 부당함을 느꼈을지 반문해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따르고자하는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이들, 나중 된 자들에 대해 더 많은 맥락을 고려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필요한 하루의 일당을 제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능력을 중요시하고, 근면함, 부지런함, 성실함을 제일로 내세우며 수능이나 각종 고시처럼 줄 세우기에 능한 한국사회는 먼저 온 일꾼들을 계속해서 양산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의 무임승차에 너무도 쉽게 분노하곤 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비교해야하는 어떤 비교 군이 생긴다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 우리가 대면한 사회 구조, 개인마다 다르게 타고난 배경과 요건 등 보다 복잡한 맥락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빈둥거림만을 가지고 나중 된 이들을 판단하지 않았던 포도원 주인의 태도를 배우는 길이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먼저 온 이들 모두의 맥락을 파악하고, 그들 모두에게 하루를 살아가야할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본문에서 하늘나라는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 때 이방인이었음을 잊지 말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하늘나라의 원리를 오늘도 함께 살아내기를 바랍니다.

각주-1

케네스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p.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