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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산선

[레디앙] 민주노동운동의 보금자리,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성문밖교회(202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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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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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태두 고 서남동 교수님에 의하면 영등포산업선교회(이하 영산)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영산은 1958년에 예장통합 전도부의 결의로 경기노회가 한국 최대의 경공업단지 영등포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선교회입니다. 기업주의 협력을 받은 공장 예배와 평신도노동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산업 전도’를 하다가, 산업사회와 노동자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권익과 주체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산업선교’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으로 붕괴된 농촌에서 상경한 노동자 대부분은 10대들로 변변한 휴일도 없이 저임금과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며 수당과 퇴직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소그룹운동은 ‘공돌이, 공순이’라고 천시당하던 노동자들을 당당하게 했고,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민주화운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소그룹은 교양과 취미활동, 음식만들기 등을 하며 틈틈이 근로기준법 등을 배우는 따스한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영산은 한국노총이 유신체제를 지지하며 노동문제를 외면할 때 노동자들의 보금자리였고, 민주노동운동의 튼실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조지송 목사님과 인명진 목사님의 뛰어난 지도력과 희생, 노동자들과 실무자들의 헌신으로 감리교 인천산업선교회와 쌍벽이 되어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문제를 교회와 사회에 알리는 가교가 되었고 세계교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민중신학자 권진관 교수님(성공회대 명예교수)은 저서 <예수, 민중의 상징. 민중, 예수의 상징>(동연)에서 산업선교가 민중신학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썼습니다.

“민중신학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민중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소수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활동이 있었다. 민중신학은 그 실천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태동된 것이다. 그 실천은 산업선교에 종사했던 목회자, 평신도, 그리고 노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여기에 더해서 기독학생들이 동참하였다.”(375쪽)

한편 산업선교는 한국교회의 사회선교를 열었고 교회성장에도 기여하였다고 평가받습니다. 제가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의 교육훈련원장이던 2011년, 목회자모임에 서울대 김병현 교수를 초청하여 한국교회의 신뢰도 문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강연 후 제가 영산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 교수는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자기가 연구해보니,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섬긴 산업선교 등 민중선교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이 토대에서 70-90년대 한국교회가 급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노동운동사에서는 산업선교가 민주노동운동의 그루터기였다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장숙경 박사의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도서출판 선인)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산업선교는 1960-1970년대 한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에 가장 깊게 관여해 큰 영향을 미친 노동운동단체로, 한국 민주노동운동의 시원(始元)을 논한 때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이다. 산업선교는 그동안 개신교의 선교단체였다는 이유로 한국민주화운동사나 노동운동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고, 그 활동내용이나 의의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19쪽)

“산업선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가장 먼저 눈 뜨고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대항한 유일한 운동이자 운동체였다.”(20쪽)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5월 조찬기도회에서 “북한 공산당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종교계에 침투하려 하고 있다”고 경고하며, 산업선교회를 견제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대가로 서울 정동에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 김준곤 목사) 회관을 세워주었고,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엑스플로 74’ 같은 초대형 전도집회를 위해 통금 해제, 버스노선 변경, 군대 텐트 사용 등의 파격 지원을 하였습니다.

군사정권의 주요 탄압도구는 용공화 공작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정권에서 극에 달했습니다.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경찰 등 공안기구들의 감시망은 더욱 촘촘해졌고, 노동자 회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취업이 막는 한편, 합동수사본부는 산업선교와 민주노조의 노동자들을 연행하여 남자들은 삼청교육대로 보내거나 해고했습니다. 거기다가 신군부가 설치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산업선교의 노동문제 개입을 차단할 목적으로 1980년 12월 31일 노동관계법을 대폭 개정하면서 ‘제3자개입 금지조항’을 신설하였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은 “도산(都市産業宣敎會)이 들어가면 도산(倒産)한다.”는 관제데모를 조직하였고, 산업선교를 빨갱이로 낙인찍는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등을 제작하여 공단에 무차별 살포했으며, 대대적으로 동원한 매스컴의 왜곡보도는 국민과 교회가 그릇된 시각을 갖게 했습니다.

MBC는 1979년 8월, 보도특집에 어용 한국노총의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을 불러내 “산업선교회에 가입한 여공들이 젖가슴에 면도칼을 넣고 다니며 필요할 때는 자해행위를 하여 근로자들을 흥분시키는 등 수법이 공산당과 똑같다”고 방송했고, 1982년 7월 19일과 28일에도 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좌익 용공으로 몰았습니다. 경향신문은 1979년 8월 18일, ‘도시산업선교회의 정체’라는 제목으로 “계급투쟁 고취, 배후엔 불순세력이 철저한 점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1982년 4월부터 6차례의 기획시리즈로 산업선교회를 난도질했습니다.

군사정권의 회유와 압력을 받은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영산에 깊은 상처를 냈습니다. 특히 1984년 예장통합 총회에서 6개 조항으로 영산을 해체하려고 시도했지만, 신학생들과 개혁총대들의 거센 반대로 ‘산업선교’를 ‘산업전도’로 명칭을 바꾸는 선에서 멈추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지송 목사님과 인명진 목사님, 실무자들과 노동자들은 연행, 수배, 구속, 해고로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다행히 이정학, 차관영 목사님 등 산업선교위원들은 압력을 받으면서도 방어막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지원은 끊기는 등 어려움이 커졌을 때, 늘 선교사를 파송하며 늘 긴밀하게 협력해온 호주교회를 비롯하여 세계교회협의회(WCC), 독일교회 등의 지지와 연대, 재정지원이 견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건축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1979년 7월에 독일교회의 지원과 노동자들의 헌금 등으로 지은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은 노동자는 물론 농민, 학생, 교회청년들이 사용하는 매우 유용한 건물이 되었고, 2천여명이 모이는 노동자 집회도 여러 차례 열렸습니다.


그림=이근복

저는 제3대 총무로서 1983년에서 1990년까지 일했습니다.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1대 총무이신 조지송 목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5개월간 공장노동을 했습니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가 1973년에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시작한 노동자야학에 4년간 참여했고, 영산 야간학교에서 교사로 임한 것이 끈이 되었습니다. 노동자로부터 산업선교를 고립시키는 신군부의 책략에 맞서 새로운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한 활동을 활성화했습니다. 노동문제 상담전화, 명화감상, 중고옷 나눔을 시작했고, ‘푸른공동체’를 열어 기타반, 노래반, 문화반, 풍물패를 운영했으며, 취업을 위한 재봉과 용접기술 교육도 실시했습니다.

이 시기에 성문밖교회가 산업선교를 지키는 견실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연극, 노래극, 대화식 설교 등으로 새롭게 진행했고, 수요예배와 구역예배도 드렸고, 공동체성을 중요시하는 가운데 지식인들의 참여도 잘 이루어졌습니다. ‘노동자’, ‘노동자신문’이란 소책자와 함께 제가 직접 펜으로 작업한 ‘성문밖교회 주보’(12-16쪽)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노동운동 소식을 전하는 잡지가 되어 매주 300여부씩 발송하였습니다. 이런 성문밖교회는 민중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뒤늦게 역사적 가치를 깨달은 예장통합이 영산회관을 총회역사유적지 제8호로 지정하였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도 영산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여, 2010년 11월 25일 역사유적지지정 감사예식과 민주화운동기념비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산업선교회인 영산은 비정규직노동선교센터를 통한 현장투쟁 지원, 노동단체와 연대, 기독청년의 현장노동훈련, 노동자 상담과 교육, 현장에서 성서를 새롭게 보는 ‘발바닥으로 읽는 성서’ 등을 진행하며 ‘경제협동공동체 다람쥐회’와 ‘서로살림도농 생협’, 취약계층의 사회적협동조합 ‘노느매기’, 홈리스선교기관 ‘햇살보금자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히브리서 13:12,13)

예루살렘의 기득권세력을 거부하신 예수 따름의 의미가 가장 잘 표현된 교회명입니다. “성문밖”이란 이름을 뭔가 삐딱한 교회 명칭이라고 정보기관이 눈치챘다는데, 성문밖교회는 영등포산업선교회가 1974년에 세운 교회로 산업선교와 한 몸입니다. 노동자들의 ‘엑소더스’라는 주일 오후 기도모임이 그루터기가 되어 ‘노동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설립되었고, 1983년에 ‘성문밖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성문밖교회 설립에 주도적이었던 인명진 목사님은 교회시작의 동기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1. 산업선교를 개교회로 바꾸어 극심한 탄압에 대처하고 모든 집회가 금지될 때, 예배는 막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했다. 2. 국내교회 헌금이 다 끊긴 때라(해외교회 지원 이전) 예배하는 교우들의 헌금으로 재정을 충당하고자 했다. 3. 의식화나 임금 등 노동조건 개선으로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안되고 영적인 힘으로 인간이 변화된다고 생각했다.(<성문밖 30년사> 84-87쪽).

지금 성문밖교회가 주일예배에서 매주일 드리는 공동기도문은 이렇습니다.

“성문밖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저희들은 이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에 지배받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주의 말씀에 따라 나눔과 섬김을 지향합니다. 저희들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인종, 성적으로 소외된 생명들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저희들은 세상의 성문밖의 사람들과 연대하며 나가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공동체입니다. 성문밖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여 몸된 저희들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어 당신을 닮아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노동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임희국 교수의 저서 <블룸하르트가 증언한 하나님 나라>(대한기독교서회, 2020)에 한국교회의 길이 담겨있습니다. 독일신학자 블룸하르트는 교회와 사회를 한 몸으로 파악하고, “창고에 가득한 부를 소유한 교회가 가난한 대중의 탄식을 외면한다면, 교회는 사회문제를 방치하는 것이다.”(104쪽),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현실 국가교회제체를 비판하며 교회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교회가 겸손하게 사회민주당과 이 노동자들을 품어야 한다.”(110쪽)는 주장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모든 노동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므로, 임금체불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코로나로 인하여 더욱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등 약자들과 힘껏 공감하고 동행하지 않으면 회복이 힘들 것입니다.

지난 2021년 2월 16일,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갈릴리교회 인명진 원로목사, 영등포산업선교위원장 정명철 목사, 영등포노회장 곽근열 목사, 총회 사무총장 변창배 목사, 서울시의회 운영위원장 김정태 시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선교회관 리모델링 착공예식을 가졌습니다. 건축 43년만에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 내부 일부를 철거한 강당에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주일예배에서 자주 부른 “자유 찾아 가는 길”(조지송 목사 곡), 노동자들의 숨결과 노래, 절규와 함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작년에 다시 총무를 맡은 손은정 목사님이 성문밖교회 김희룡 목사님과 함께 시대의 변화를 읽으며 더욱 힘차게 전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