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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산선

[한겨레]억눌린 노동자들에게 산소 같았던 '산선60년사'이어가야죠(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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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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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손은정 목사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를 두번째 맡고 있는 손은정 목사. 사진 조현 기자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과 과로, 인권탄압에 시달리던 1960~80년대 노동자들에게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는 그 이름 만으로 산소나 다름없었다. 산업화 시대 가장 밑바닥에서 외마디 비명이나마 지를 수 있었던 노동자들의 성소가 깨끗하게 재단장됐다. ‘산선’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아낸 역사관과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갖춘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이 오는 11일 오후 3시 개관 축하 예식을 한다.

지난 8일 서울 당산동의 회관에서 ‘산선’의 총무 손은정(51]) 목사를 만났다.

1958년 방직·제과공장 밀집한 영등포
농촌서 떠밀려온 도시노동자 보듬어
1979년 옮겨온 당산동 건물 새단장
11일 ‘영등포산업선교회관’ 개관 예식


1999년부터 실무자…2번째 총무 맡아
“소외된 이들과 함께 치유하는 공간”



11월 11일 새로 개관하는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의 지하에 자리한 역사관의 전경. 사진 조현 기자

11월 11일 새로 개관하는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의 지하에 자리한 역사관의 전경. 사진 조현 기자



“수십 년 만에 회관에 오신 분들은 ‘여기가 이렇게 작았냐’며 믿기지 않아 해요. 요새는 150명만 모이면 꽉 차거든요. 그런데 1980년대엔 대지 200평에 세워진 각층 60평의 이 좁은 건물에 2천명이나 들어찼다고 해요. 그만큼 노동자들로 늘 북적였다는 것이지요.”

손 목사는 예수교장로회통합교단에서 1958년 방직·제과 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영등포에 자리를 잡은 ‘산선’의 특별한 역사를 회고했다.

“제1대 총무인 조지송 목사님이 가난한 농어촌으로 내려가려다 ‘이제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어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니 도시산업 노동자들을 돌보는 게 더 시급하다’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헨리 존스 목사의 말을 듣고 바로 이곳에서 산선을 시작했어요. 50대 들어 건강 악화로 1985년 청주로 내려갈 때까지 초석을 놓은 선구자였어요. 지금 봐도 경탄할 정도로 철저히 훈련 프로그램을 짜 실행했죠.”

‘1. 노동자의 언어로 말하고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 2. 예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노동자 이야기를 하라. 3. 책상에 앉아 있지 말고 거리에 나서라. 4. 머리로 일하지 말고 몸으로 일하라. 5. 교회가 원하는 것보다 노동자가 원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라. 6. 노동자의 고통을 머리로 분석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라….’

훈련원장이던 조 목사에 의해 만들어진 실무자 훈련지침에 따라, 3대 총무를 지낸 이근복(한국기독교목회자지원네트워크 원장) 목사와 5대 총무를 한 뒤 농촌 목회 중인 손은하 목사가 1984년 1기로 공장에 들어갔다. 이후 현장훈련 전통이 뿌리내렸다. 손 목사도 장신대를 졸업한 1999년 현장훈련을 위해 서울 면목동의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6개월간 하루 10~11시간씩 같은 동작만 단순 반복했던 작업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오직 낮 12시와 저녁 7시의 식사와 삶은 계란 하나 주는 오후 3시만을 기다리며 온종일 서서 일하니 미칠 것만 같았죠. 낮에 빨간 옷 작업을 하면 빨간 코가 나오고, 파란 옷 작업을 하면 파란 코가 나왔어요. ‘아, 이런 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란 말밖엔, 현란한 설교 같은 건 지친 노동자들을 더욱 지치게 할 뿐이고 화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죠.”


새단장한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의 지하 역사관에 전시된 초기 개척자들의 활동 자료. 사진 조현 기자

새단장한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의 지하 역사관에 전시된 초기 개척자들의 활동 자료. 사진 조현 기자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의 지하 역사관에 전시된 1970년대 공장 여성노동자들의 꽃꽂이 소모임 활동 모습. 사진 조현 기자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의 지하 역사관에 전시된 1970년대 공장 여성노동자들의 꽃꽂이 소모임 활동 모습. 사진 조현 기자



손 목사는 그렇게 시작해 2014년까지 15년간 ‘산선’의 실무자로 활동하고, 회관에서 운영한 노동자교회인 성문밖교회 전도사 겸 담임을 거쳐 8대 총무를 지냈다. 그리고 지난해 다시 10대 총무로 돌아와 회관의 리모델링을 마무리 지었다.

“유신독재 때는 노조 활동을 못하게 하니 꽃꽂이, 한문 공부, 서예, 요리 등 소모임을 작업장별로 예닐곱명씩 꾸려서 공동체와 민주주의, 정의가 뭔지 공부하고 훈련하게 했어요. 2대 총무 인명진 목사님은 지금도 그때 만난 노동자들 이름을 다 기억할 정도로 애정이 깊었지요. 타고 난 조직력 덕분에 인 목사님이 감옥에서 나오면 70여개의 소모임이 120개로 불어나곤 했어요. 2019년 별세하신 초대 조 목사님과 인 목사님은 12살 차이였지만 서로 존중하며 산선을 일군 주역이었지요.”

산선회관은 영등포 일대에서 몇차례 옮겨 다니다 1979년 지금의 건물로 입주했다. 1980년대 신군부의 감시 속에도, 이근복 총무는 문익환·고은·이우정 등 민주인사들을 초청해 강의를 열었고, 지하 공간에선 늘 노동자들의 풍물소리가 진동했고, 층마다 노동자들이 모여 연극과 콩트를 연기하며 노래를 불렀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선배님들은 온 삶을 노동자에 헌신하고서도 ‘산선을 내가 한 줄 았았는데 지나고 보니 노동자들과 실무자들이 했더라’고 했어요.”


영등포산업선교회 손은정 총무와 실무자들이 서울 당산동 선교회관 앞 ‘민주화운동 사적지’ 표지석에서 함께했다. 사진 조현 기자

영등포산업선교회 손은정 총무와 실무자들이 서울 당산동 선교회관 앞 ‘민주화운동 사적지’ 표지석에서 함께했다. 사진 조현 기자



1995년 민주노총이 설립돼 노동자들 스스로 활로를 열어감에 따라 ‘산선’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이후 영등포역 인근에 노숙자들을 위한 햇살보금자리를 만들어 식사 제공과 24시간 상담을 해주고, 생협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신협 다람쥐회를 복원했다. 조 목사는 유산 5천만원을 다람쥐회에 남기기도 했다. 또 2010년 ‘품’을 설립해 노동자들의 갈등과 고민·심리 상담을 강화했다. 해고자에겐 무료로,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시중의 절반 이하 비용으로, 매월 100여명에게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손 목사는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면 네 치유가 급속해질 것’이란 성경 말씀처럼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이 곧 돌보는 자들도 치유되는 지름길 아니겠느냐”며 역사관 개관을 계기로 소외된 노동자들과 함께한 ‘산선’의 역사와 정신이 우리 사회 곳곳에 더 깊이 스며들기를 기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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