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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제정 노동주일 기념 제3회 공모전 설교문 부문 당선작] 정진영 “참된 노동으로 창조 세계를 세워나가겠습니다.” (창3:14~19)

Author
영등포산업선교회
Date
2023-04-07 14:43
Views
326




정진영 “참된 노동으로 창조 세계를 세워나가겠습니다.” (창3:14~19)

[작성 취지 및 주제]

창조 세계에 있었던 하나님의 의도와 달라진 노동의 현실을 조명하고, 노동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노동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하라고 권면하며,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노동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본문]

최근의 여러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중소기업의 인력난, 주 69시간 및 4.5일 근무제, 노동의 현장에서 죽어가는 청년들, 출산 휴가 및 저출산으로 인한 미래 노동력 감소 등 노동에 관한 뉴스는 대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노동의 기원이 무엇일까요? 창세기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시려는 방편으로 노동과 출산을 통해 생명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죄 이전에 있었던 노동과 출산은 같은 얼개로 묶어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삶’이라고 불리는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1장 28절에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원어적으로는 ‘봉사하고 돌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노동 문명에 대한 원칙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연들을 돌보며, 돕는 배필로 주신 사람에게 봉사하고 섬기라는 원칙 말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이 받은 서로에게 봉사하고 돌보는 복된 자리는 저주의 자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들이 땀을 흘려야만 먹을 것을 얻는 것으로, 고통이 더해진 출산으로 변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뱀에게 말씀하신 삶처럼 처량한 삶을 살아갑니다.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받은 동물로 삶의 자리에서 배를 바닥에 끌며 눈물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며 눈물자국을 남기는 달팽이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창조 시 부여된 축복의 노동이 저주로 바뀌면서 다른 삶이 제대로 세워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잠시 ‘워라밸’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된 말이 되었습니다. 빈부격차 및 과도한 투기,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해 삶의 최소 공간인 집 마련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는 우리에게 ‘워라밸’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워라밸’이라는 말은 노동자에게 필요한 말이지만 회사에도 필요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삶의 질이 올라가야 노동의 질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리가 무너진 자리에 노동의 자리가 제대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서 가족끼리 살인이 일어나고, 출산이 위협받는 일들이 창세기에는 나옵니다. 그 모습은 오늘날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과도 매우 흡사합니다. 죄로 인해 서로 나뉜 모습은 노동에 대한 다른 이해로 더욱더 멀어져갑니다. 회사에서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워하고, 노동자들은 일할 회사가 없다며 아쉬워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이 기계로 빠르게 대체되며, 지금 있는 직업군 중에는 향후 10년 이내에 사라질 직업군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사람의 생명권, 노동권은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노동권 이야기는 멀리 한편에 겨우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 노동자의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생명은 어떻게 될까요? 같이 보장될 수 없을 것입니다. 노동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돕는 배필, 원어적으로 마주 보고 돕는 자를 괴롭히게 되며 이러한 과정에서 고용주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 제23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노동의 권리, 자유로운 직업 선택의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에 관한 권리 및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고용주가 있을까요? 아쉽게도 우리가 처한 노동의 자리, 삶의 자리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죄가 임한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쫓겨납니다. 이제는 매서운 죄의 세계로 들어가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아야 하는 인생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인생의 시작 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선물을 주십니다.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을 주시는 분입니다. 인류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은 이미 그의 아들을 예정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이 넘치는 교회로 우리를 부르셨지요. 예수님을 믿는 구원받은 무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고 돌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고생하며, 힘들어도 주님 한 분 생각하면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힘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전히 녹록치 않습니다. 노동의 자리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일과 쉼의 균형, 워라밸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얼마나 됩니까? “내가 있는 노동의 자리는 행복한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지만,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노동의 자리가 팍팍하니 쉼의 자리를 비롯한 삶의 여백이 녹록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자리가 힘이 들수록 주님의 사랑으로 이겨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도 한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무관심임을 이제는 압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금도 각자의 고된 삶의 자리에서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 고된 자리의 정중앙에는 노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생명을 위한 재화가 탄생하는 자리이기에 그 자리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도 원하든 원치 않든 노동을 중심축으로써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노동의 자리가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 삶의 중심축이 고되니, 삶의 영역의 모든 것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에 팍팍한 삶을 살아가니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물론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이들이 몇몇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물든 노동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이겨낼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오늘은 노동 주일입니다. 주일 앞에 노동이 붙음으로써 왠지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다른 주일보다 안식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편견이지만, 우리의 실존을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어 슬픕니다. 본래 노동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매 주일도 하나의 절기로서 ‘작은 부활절’인 것을 아시는지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했습니다. 오늘도 그러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부활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땀과 눈물, 예수님의 피, 그분의 상처와 고난의 섞인 숨소리.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참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삶이 고된 우리의 삶에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죄를 깨뜨리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노동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치시고 아픈 자를 고치시고, 약한 자들을 찾아가 돌보셨던 것이었습니다. 노동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의 노동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노동의 개념을 창세기에 있는 대로 돌보고 섬기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라도 바꾸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와 가정, 노동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해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노동의 자리에서 섬기기 어렵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노동,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섬김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섬김으로 노동의 부조리한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보자는 것입니다. 현실의 노동을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노동을!

오늘 이 시간 노동에 관한 다른 성경 구절로 현실노동에 대한 고발이나 대응책을 말씀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며 격려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힘을 내서 노동권, 생명권에 목소리를 낼 때 우리의 그 힘은 예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구체화되어 목소리로 나오기 전, 마음이 강건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강건함은 삶에 지친 우리가 서로를 위로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동안 우리가 어떤 힘으로 살아왔습니까? 가족을 위해서 내는 초인적인 사랑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동의 자리에서는 달팽이의 걸음처럼 불안하게 한걸음씩 살아왔습니다. 회사에서 야근하면서, 직장에서 출산 때문에 사직서 제출을 고민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근무 여건에 한숨을 쉬면서 말입니다. 그 자리는 처량했지만, 다행히 나 혼자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같이 목소리를 내줄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노동 주일을 맞아 삶의 노동을 윤택하기 위해서 성경이 태초에 말했던 노동과 예수님의 삶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이가 고된 삶의 자리에서 노동으로 지쳐있는 이들이니 이들을 사랑하자고.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하는 시간이 바로 오늘이니, 힘써 위로하자고 전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노동의 참된 의미입니다. 본래의 노동은 서로를 마주대하여 봉사하고 돌보는 행위인데, 세상에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부터 그렇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각자의 삶에서 노력해왔으니 오늘은 서로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노동이라는 말에 오해와 편견을 내려놓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위로를 옆에 있는 분들과 나누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서로를 위로하는 참된 노동이 있을 때 그 위로로 인해서 노동하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강건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