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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산선

[에큐메니안] "하나님 나라와 노동, 한국의 노동 현실을 묵상합시다"(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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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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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산업선교회, 《일터에서 꿈꾸는 하나님 나라》 노동주일 예배문과 주간 묵상집 발행




책을 소개해야 할 자리에 편집자의 긴 신변잡기로 시작하게 되어 좀 머슥하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늘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편집자는 72년생이다. 바뀐 규정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익숙한 셈법으로 하자면, 올해로 53세이다. 이런 별 영양가 없는 나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소위 한국 현대사에서 급속한 현대화가 진행되던 시대의 한복판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길게도 돌아온 것이다.

죽는 것만큼 말하기 싫었던 아버지의 직업, 노가다꾼

하여간 내가, 그 당시 용어로, ‘국민학교’에 입학한 연도는 1980년도 3월이었다. 필자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기에 어머니께서 나를 업고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통학을 시켜 주셨다. 오전과 오후반이 따로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존재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도움 없이 등하교가 자유로워졌을 무렵에, 5학년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반에서 무슨 조사 같은 것을 했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손 들어요.”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 들어요.”…

그렇게 조사를 하다가 그 다음에는 무슨 종이를 받았던 것 같다. 그 종이에 적힌 질문들을 읽어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직업을 쓰는 난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의 직업을 쓰는 건, 속된 말로, 전혀 부끄럽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직업을 쓰는 것이 정말,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죽을만큼 싫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그 당시 말로 ‘노가다꾼’이셨기 때문이었다. 이런 조사가 진행될수록 저 노다가라는 말을 대신할 단어를 찾는 것도 늘어갔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회는 지금 돌이켜 보면 엄청난 건설 붐이 있었던 때였다. 우리집은 소위 하늘 첫 동네였던 산비탈에 자리잡은 달동네였지만 여기저기 건설공사는 엄청나게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그 건설 현장들 중에서, 아파트가 아니라, 일반 주택 건설 현장에서, 빨간색이나 회색에 가까운 벽돌이 아니라, 그것 보다는 5배는 더 크고 가운데에 구멍이 세 개 뚫려 있는, 이 단어가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쓴 것인데, ‘브로꾸’를 쌓는 일을 하셨다.

아버지가 손재주가 좋으셨던 것도 같고, 아버지 성격이 워낙 사람 좋아 하시고 유하셨던 분이라 ‘노가다 십장’, 기억하는 단어들 모두 일본어들이 좀 부끄럽지만 기억에 각인되어 있어서 그냥 쓴다, 쯤 되는 아저씨들이 늘 아버지를 찾곤 했다. 하지만 하시는 일이 그러니 겨울이면 일거리가 없으셨기에 아버지는 거의 매일 같은 일을 하시는 친구분들과 술에 취해 계셨다. 그러다 보면 어머니와의 싸움을 그냥 일상이었다. 두 분이 싸우시는 통에 큰 소리도 많았지만, 다행히 가정 폭력 수준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그렇게 궁핍하고 시끄러운 겨울이 지내야만 집안의 평화는 찾아왔다.

지금이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풀어 쓸 수 있지만 아버지의 이 직업을 쓰는 게 그때는 왜 죽을만큼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먼 과거의 일이지만 그 당시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떠오르기에 그 당시의 감정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이유를 찾지 못하는 건 아마도 세월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정말 이유도 없이 아버지의 직업을 쓰는 것이 부끄러웠고 죽는 것만큼 싫었다.

“굶어 죽더라도 기술 같은 건 배우지도 않을 테다”

그리고 또 하나 노동과 관련해 떠오르는 가장 강렬한 기억은 중학교 3학년 초반의 것이다. 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어떤 종류의 고등학교를 가야 하느냐에 대해 아버지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지만 어머니는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셨다. 그 당시에는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 인문계라고 했고, 그 외의 고등학교를 통틀어 실업계라고 했고, 기술은 ‘공고’, 소위 은행이나 사무 회계 등의 기술을 익히는 곳을 ‘상고’라고 했다.

이제 슬 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하던 그때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첫 말씀은 “니는 몸이 불편하니까 인문계 가지 말고 공고 가서 기술 익혀. 그래야 먹고 살어. 아니면 구두닦는 기술이라도 배워. 그거라도 해야 먹고 살어.” 과장 좀 섞어 말하자면, 어머니의 저 첫 말씀에 치가 떨렸다. 그때 내 마음에 떠올랐던 첫 감정은 “내가 왜?”였다. 그 이후로 반항기로만 살았던 것 같다. 공부도 잘못하면서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했고, 그러면서 ‘굶어 죽어도 절대 기술 같은 건 배우지도 않을 테다’라고 다짐 또 다짐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진학 이후로 지금까지 책과 글 속에서만 사는 사람이 되었는데, 아마도 저 두 경험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렇지만 소위 노동과 노동자들에게 악감정 같은 것을 가져본적은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된 노동을 생각하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학을 진학하고는 노동과 노동운동에 늘 마음이 있어 교회가 ‘죄인 중의 죄인, 괴수 중의 괴수’라고 했던 경제학자이자 사회과학자의 책들을 끼고 살았다. 그리고 내가 내 돈으로 처음 구입했던 신학책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었다.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양가감정이 늘 교차했던, 그리고 노동해방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찬 대학시절이었다.

그렇게 저렇게 살아오니 지금도 관심은 늘 노동과 노동자이고 이와 관련된 일들이다. 에큐메니안이 교계 신문이라 그렇게 깊게 관여해서 기사를 낼 수 없지만 기회가 닿는대로 노동 현장을 찾는 건 어느 신문 못지 않다. 교계 신문들 중에서 좀 별종에 가깝지 않나 싶다. 이런 편집자의 얄궂은 성격에 기자들이 별말 없이 맞춰줘서 고맙다.

노동과 노동자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너무 이야기가 돌아왔다. 이제 본론 좀 이야기하자. 며칠 전 에큐메니안 홍인식 대표께서 보도자료를 하나 보내주셨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터에서 꿈꾸는 하나님 나라: 노동주일 예배문과 주간 묵상집》이 출간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보도자료였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보내주셨기에 일단 저녁 먹고 생각해 보자고 남겨 두었다가 밤 늦게서야 보도자료를 읽었는데, 정말 가감 없이, ‘아니, 이게 무슨 보도자료야’, 하는 말로 순화해서 쓰고 끝내고 싶었지만, 솔직히 쓰는데, 욕이 나왔다.

보도자료만 쓰면, “출간되었습니다” 하고 끝낼 수준이었다. ‘하’, 하는 장탄사와 함께, 그 밤늦은 11시에 영등포산선 송기훈 목사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목사님, 밤늦게 대단히 죄송합니다. 혹시 아직 안 주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산선에서 묵상집 펴낸다고 보도자료를 보냈는데요. 어우, 이게 소개할 내용이 거의 들어있지 않아서요, ㅠㅠ 혹시 괜찮으시면…” 그렇게 결국 책을 손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내가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노동과 노동자에 관한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받아든 예배문과 주간 묵상집의 내용을 읽어갔다. 머리말에서부터 아프다.



“지금은 노동주일을 지키는 교회가 아주 소수지만, 심지는 꺼지지 않고 65년을 이어왔습니다. 우리는 올해 노동주일 제정 65주년을 뜻깊은 해로 보며, 극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과 플랫폼노동자들을 위해 더욱 힘써 기도하며 생명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손 총무의 또 다른 이야기가 또 아프다. 왜 한국 교회가 여기까지 흘러왔나 싶어 아프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일부였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에게 교회 한켠을 내어줄 수 있었던 교회마저도 이젠 손을 꼽을 지경이 되어버린 우리 교회들 때문에 아프다.

노동과 하나님 나라를 묵상한다



“다같이 : 이 땅에 일하며 사는 모든 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기도합니다. 아멘.”




노동주일 예배문 교독시의 마지막이다. 우리 사회의 노동현장이 여전히 죽음과 멀지 않다는 사실이 아프다. 그래서 안전하기를 기도해야 하기에 아프다.

그리고 노동주일 공동기도문의 한 구절은 이렇다.



“정직한 노동으로 청년들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의 평화를 지켜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정직한 노동으로는 집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운 우리 사회. 정직한 노동으로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벌이로는 가정의 평화가 깨어질지도 모르는 우리 사회. 우리의 노동은 아직도 그렇다.



“냉정하고 비정한 세상 계산법에 반기를 들고, 또 누가 소외된 사람이 없는지 찾아 나서는 것이고 또 밖으로 나가보는 것입니다.”




노동주일 설교문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권면이다. 스스로가 노동자이면서 노동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있는 교회이면서, 우리 대다수의 교회는 왜 이렇게 육체 노동자들에게 비정할까. 이런 권면이 이제는 불가능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바뀔수나 있으려나 하는 냉소마저 올라온다.

그런데 노동주일 주간 화요일 묵상 글에 이런 부분이 등장한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임금노동자의 힘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차별의 일터를, 불평등과 소외를 견디어 내느라 바쁩니다. 그러느라 마음속에 냉소와 체념을 갑옷처럼 품고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체념이라도 하며 삶을 견디려 할 뿐,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을 닮은 따뜻한 심성까지 자본화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십시일반 정신, 그런 연대 정신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2024년에도 희망을 품어봅니다. 산재가 발생하지 않는 적정한 노동, 의식주에 대해 큰 걱정 없는 적정한 임금, 정의롭지 못한 각종 차별이 사라진 일터의 모습을 말입니다.”




약간 슬프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했던가, 결국 노동자들의 강고한 연대만 있을 뿐인가 하는 생각에서 슬프다. 하지만 백번 생각해도 백번 다 맞다. 아니 노동자들만의 연대가 아니라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연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영등포산선이 펴낸 예배문과 묵상집을 읽으며 아프고 슬프고 했다. ‘여전하지, 바뀐 건 없지’ 하는 생각에서 냉소적인 감정도 올라왔다. ‘노동해방’이라는, 한국 교회가 치를 떠는, 이 단어가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교회는 언제쯤 아무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이는 때가 올까 싶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 사회과학 용어의 성서의 말이기에 그런 날은 올 것이라 신앙하게 된다.

이번에 영등포산선에서 펴낸 노동주일 예배문과 주간 묵상집인 《일터에서 꿈꾸는 하나님 나라》에 집필진은 그야말로 전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김진명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이종란 노무사(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송효순 집사(성문밖교회), 하재형 청년(기독청년산재연구모임), 김신약 목사(NCCK 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김혜영 활동가(故 이한빛 PD 모친) 등이 참여했다. 출판의 실무를 담당한 최윤민 목사(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선교부·쉼힐링센터)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균형 있고 풍성하게 ‘노동’을 이해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한 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이 전혀 과정이 아니었다.

이 《일터에서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영등포산선(02-2633-7972)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정가는 3,000원이고 배송비는 별도이다. 주문 신청링크는 ‘클릭’하면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에서 제정한 것이지만 4월 마지막 주일부터 한 주간 우리 사회의 노동과 노동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묵상하며 지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이정훈 typolog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