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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산선

[뉴스앤조이] 함께 저항하는 여성들의 '자발적 소그룹 활동'이 중요한 이유(2022.7.27.)

작성일
2022-09-2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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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여성과 움트다] 작은 쐐기가 큰 바위 쪼개듯 다양한 이야기 움트길

 

성차별적·가부장적 문화에 저항하는 교회 여성 네트워크 '움트다(WUMTDA)' 활동가들이 '여성주의 예배'를 주제로 글을 연재합니다. 여성주의 예배 이론을 비롯해 교회 안팎의 다양한 현장 경험, 여성들의 연대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배, 여성과 움트다'는 격주에 한 편씩 발행됩니다. - 편집자 주

2020년 6월 목사가 됐다. 안수받기 전 몇몇 선배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목사가 되고 나면 '빼박'이니 잘 생각하라고. 빼도 박도 못 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마냥 우습게 들리지는 않았다. 목사의 삶에 그만큼 제약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여성 전도사가 '목사'가 되면 현실적으로 사역할 자리가 적어진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목사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더불어 평생 신 앞에 겸허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어 왔고, 목사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한국 개신교 사회 안에 더 많은 여성 목회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요즘 나는 주중에는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도서관에서 활동가로, 주말에는 노동운동과 닿아 있는 교회에서 목사로 살고 있다.



목사이자 '움트다' 활동가인 하하움. 사진제공 움트다

 

지금 있는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교회는 출발부터가 노동자들과 함께였다. 노동운동의 산실이었던 영등포산업선교회 안에 노동 교회가 세워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 교인들 중에는 이 시기에 활동하던 여성 노동자도 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급격한 흐름 속에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밀려온 노동자들이 땀 흘려 이뤄 낸 결과였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가장 큰 주역이었음에도 이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견디며 도시 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도시 노동자 중에는 여성도 많았다.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 분야에서 여성 일자리가 대거 창출됐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성인으로 위장 취업한 10대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남자 형제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또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나와 제조 공장에 취업한 여성들이었다. 당시 사회 전반에 흐르던 가부장 질서는 가정뿐 아니라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였어서, 어린 나이에 공장노동자가 된 여성들은 저임금과 여성 차별이라는 이중 억압 구조 속에서 고통받았다.

"왜 가난하게 태어나 너무나 어려 공장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야만 되는가. 남들은 공부를 하는 나인데. 전에 내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하였을 때 오빠는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라고 답장이 왔었다. (중략) 그렇지만 하는 수 없다. 이 길이 나를 위하고 우리 식구를 위하는 길이라면…." [송효순, <서울로 가는 길>(형성사), 32쪽]



<서울로 가는 길>(형성사)는 산업화 시기 여성 공장노동자였던 송효순 씨의 수기다. 송 씨는 하하움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집사이기도 하다.

 

1960년대 한국 개신교는 정치권과 유착 관계를 맺은 보수 계열 교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의 축복, 반공 메시지를 앞세운 복음 전도는 산업화 시대의 열망 속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교회는 계속해서 몸집을 불려 나갔다. 이런 가운데 노동 현장에 주목한 소수의 개신교 그룹이 있었다. 대한성공회·기독교대한감리회·한국기독교장로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등 몇몇 교파가 인천, 강원도, 대구, 부산, 서울 영등포 지역 등에서 '산업 전도'를 시작했다. 한국의 산업 전도는 초창기에 노동자들과 기업가 모두를 대상으로 한 하나의 전도 전략이었지만, 1960년대 중반 각 교단에서 노동 훈련을 거친 전문성 있는 실무자들을 현장으로 내보내면서, 점차 노동자 중심의 선교 사업으로 바뀌어 갔다. 이후 1968년을 기점으로 '산업 전도'라는 명칭이 '산업 선교'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산업 현장에서 교회의 역할이 단순히 복음 전도를 넘어 노동 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에 동참하는 데 있음을 의미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산업 선교는 노동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나, 유신이 선포되고 정부의 노동 억압 정책이 점차 조직적으로 진행되면서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노동문제와 관련한 어떤 모임이나 집회도 허락되지 않았고, 관련 실무자들이 수감되는 일도 많았다. 이 무렵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노동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고안하게 되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의 자율적인 '소그룹 활동'이었다. 참여자 대다수는 영등포 지역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주 모여 뜨개질·꽃꽂이·요리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배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일상적인 활동에서 시작해, 노동법을 함께 공부하고 스스로 처한 현실을 인식하며 문제 해결 의지를 다지는 데까지 나아갔다. 소그룹 활동은 영등포 지역뿐만 아닌 타 산업 선교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고, 많은 여성노동자가 이를 통해 자신을 노동운동의 주체로 자각하고 정부와 기업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길러 나갔다. 이후 여성들이 스스로 민주노조를 조직하고 노동 투쟁을 해 나가는 데 발판이 됐던 것이 바로 이러한 소그룹 활동이었다.

"모임을 통해서 우린 돈을 쓰는 법, 친구를 대하는 바른 태도, 모임을 잘해 나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서로 어려운 일을 돕기도 하고 노동자가 가난한 이유, 우리가 살아야 할 바른 삶 등에 대해서 배우기도 했다.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오로지 나와 우리 집만 생각하고 어쩌다 한 번씩 노동조합의 행사에만 참여하던 내게는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동료들과의 관계, 사회가 돌아가는 것, 우리나라의 실정, 새로운 인생관, 모든 것이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이옥순, <나 이제 주인 되어>(녹두), 58쪽]

"노동법에는 분명 8시간 노동이라 정해져 있고 시간외근무를 했을 경우 수당을 지급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 직포과의 경우 그것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중략) 법으로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모두들 포기한 채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그런 상태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아니 우선은 나 자신부터 그런 노예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을 오히려 순종하는 여자의 미덕으로 착각하지 않았던가." [석정남, <공장의 불빛>(일월서각), 28쪽]

 



유신 정권의 노동 억압 정책 시기, 여성들의 자발적 소그룹 활동에서 일어난 시너지 효과는 노동운동과 사회참여에 큰 활력을 제공했다. 사진 제공 영등포산업선교회

 

여성 노동자들은 소그룹에서 노동문제와 인권을 공부하며, 차별당하고 멸시받던 여공에서 한 사람의 노동자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인식은 개인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의 소그룹 활동이 1970년대 노동운동 안에서 발휘했던 묵직한 힘에 새삼 놀라며, 목사인 나는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여성 소그룹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 교육이나 양육에서 사용되던 명칭이 아닌 하나의 활동 단위로서, 여성들은 '구역'이나 '여전도회'와 같은 소그룹을 이뤄 자율적으로 모였다. 남성 중심적인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결성한 이런 작은 모임들은 서로를 촘촘하게 엮어 내며 교회를 지탱하는 큰 힘으로 작용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활동하고 있는 '움트다'라는 또 하나의 소그룹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시작도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2019년 인도로 신학 훈련을 다녀와 참여했던 보고회에서 만난, 언니 같은 목사님의 "함께 저항하자"라는 말 한 마디에 이끌려 나도 다른 여성들을 만나게 됐고 그게 '움트다'로 이어졌다. 움트다의 '움'으로 활동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좀 신기하고 묘한 기분이 든다. 서로 다른 궤적을 걷던 사람들이 어느 날 신앙이라는 공통 영역에서 우연히 만났고 어쩐지 계속 모이게 됐다. 이외에 다른 말로 이 만남을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교회 내 여성으로 존재하며 무수한 차별과 배제에 익숙해진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서로를 마주하면서 새삼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 이것이 우리가 모임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과거 여성 노동자들을 노동 현장의 주체로 이끄는 '의식화의 장'이었던 소그룹 활동이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차별 구조 안에서 이름을 잃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약한 존재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쐐기가 큰 바위를 쪼개듯이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가 움트는 소그룹들이 많아진다면, 노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 이슈에 침묵하는 교회의 경직성과 가부장적 문화에 균열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목사인 내가 어쩌다 교회가 아닌 청소년 도서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학교 밖 청소년·청년들을 만나고 있다. 내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보육시설에서 지내다가 보호 종료가 된 친구들이다. 생전 처음 접해 보는 고달픈 삶의 면면을 대하면서,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타까운 마음에 퇴근할 때마다 울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열불 나는 일이 많아 혼자 씩씩대다가도, 아이들과 다시 눈을 맞추고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면 제 길에서 한참 벗어나 비틀비틀 걷고 있는 괴롭고 공허한 영혼이 느껴져 한없이 짠한 마음이 든다. 나는 원래 신께 "~해 주세요" 하는 기도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지내며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뭔가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나를 자주 발견한다. 아이들 삶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 기도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그렇다. 이러한 순간들이 나에게는 예배의 순간이고, 그 예배는 '교회 바깥'에서 드려지는 예배다.

내가 목사가 되던 날, 지금까지도 비신자이신 부모님이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의 안수식에 참여하셨다. 모두가 남성 목회자에게 안수받을 때 홀로 가장 가까운 멘토이자 언니였던 목사님에게 안수받았던, 많은 이의 축하와 격려가 있었던 그날. 한복 입은 사모들 사이에서 자랑스럽게 개량 한복을 입고 흡족해하던 짝꿍의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왜 목사가 됐느냐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글쎄요…" 라는 답이 가장 먼저 나올 것 같다. 서두에 말한 목사 안수의 이유가 왜 목사가 됐냐는 질문의 답은 아닌 것 같고, 오글거리는 멘트로 답하고 싶지 않은 허세도 내 안에 약간 있는 것 같다. 더는 쿨한 척 못 하겠다. 그래도 꼭 말해야 한다면, "함께 이 길을 걷는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시때때로 마음을 슬프게 하는 세상의 수많은 일 앞에서 '함께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목사가 됐고,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예배드리는 이유다.

하하움 / 학교 밖 청소년들의 친구이자 정다운 이웃으로 살아가고픈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