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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산선

[통일뉴스] 마흔 여섯째 이야기,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1) (202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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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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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24)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회-백소(白笑)]

 

기후위기라는 말이 절감될 정도로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40도가 넘는 날이 이어지고, 그 때문에 산불도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오늘은 민주시민교육단체가 민주주의현장 탐방기획 중 하나로 구로지역노동탐방을 한다고 해서 신돌석씨는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집을 나섰다. 신돌석씨가 어디 가는 데 거의 이견을 달지 않는 아내도 오늘은 너무 더우니 나가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고, 나이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오늘만큼은 현장탐방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 구로노동탐방의 핵심 의제가 구로동맹파업이기 때문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던 1985년은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한 해이다. 공장에서 노조준비위에 참가하고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었다. 사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몰랐고 어리둥절했었다. 노조준비위에서도 대부분 구로동맹파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학생 출신 노동자였던 조철구와 당시 교회나 가톨릭 단체 등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노동자 한두 명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뒤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을 통해, 강의를 통해, 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직접 그 현장에 탐방을 한다는 것은 신돌석씨로서는 놓치기 어려운 기회였다. 그래서 무더위에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은 현장 강의도 많고, 줌 강의도 많다. 너무 많아서 따라다니면서 듣기도 바쁘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여기저기서 하는데 하나로 모아서 할 수는 없는지 신돌석씨는 궁금하였다. 전국의 민주시민교육단체가 하나의 연대체를 만들어서 교육 일정이나 내용 등을 겹치지 않게 만들면 좋지 않을까? 그런 시도를 한 적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왠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을 민주시민교육이라고 하던데 관심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교육하겠다는 데 관심 있는 사람이, 들어서 배우겠다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함량 미달인 강사가 하는 강의도 적지 않았다. 특히 강사가 거의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 또는 연구자들이라는 점도 신돌석씨는 사실 불만이었다. 물론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활동을 통해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강사가 왜 별로 없는지 모르겠다. 1980년대에 노동교육을 처음 받을 때는 70년대 민주노조 간부 출신이거나 그들과 함께 했던 활동가들이 대부분 강사로 나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노조의 상급조직이나 거기서 초빙한 전문가들이나 활동가들이 강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 학자들의 강의를 들어야 하였다. 신돌석씨는 사실 그러한 교육들이 진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노동운동의 역사, 아주 생생한 현대의 노동운동사를 학습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처음 노동운동이란 걸 알게 됐을 때 종교기관 등에 가서 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골방에서 조잡하게 복사된 정체불명의 문건들로 학습을 할 때에 비하면 이런 것도 어쩌면 배부른 투정일 수도 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날이 흐려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구로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하였다. 신돌석씨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너무 일찍 나온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만 전철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뜨니 숭실대입구역이다. 부랴부랴 반대편으로 가서 다시 전철을 타고 가니 10분 정도 늦었다. 집결 장소에 도착하여 출구로 나오니 반대편에 이 행사를 주최하는 단체의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는 늦거나 길을 잘못 찾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건널목에서 서 있었다. 그가 안내해 주는 대로 왼쪽으로 뛰듯이 걸어가 보니 10여 명 정도가 가고 있었다. 대부분 50대 정도의 여자들이었다. 요즘에는 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이런 행사에 적극적이었다. 남녀를 구분하기보다 사람 나름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신돌석씨가 보기에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확실히 진보적이다. 그만큼 기득권과 멀리 억압받고 살아서 그런지 여자들이 한번 의식화되면 확실히 남자들과는 달랐다. 신돌석씨가 아는 주위의 남자들은 이런 데 오는 것을 싫어하였다. 젊은 사람이 없는 것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사실 젊은 사람들을 참여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의 개인주의화 나아가서 보수화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신돌석씨 생각에는 그건 지나친 판단인 것 같았다. 젊은 사람들이 시간을 낸다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동기화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신돌석씨 지역에서 일하는 여자도 한 사람 와 있었다. 신돌석씨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사람을 제외하면 단체 대표 빼고는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맨 처음 간 곳이 구로공단노동자 생활체험관이었다. 대로변에서 골목으로 조금 걸어들어가 보니 2층짜리 다가구주택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그곳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주택처럼 보였다. 입구에는 ‘금천 순이의 집’이라는 명칭이 있었고, ‘서울시미래유산’이라는 표지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의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고교얄개 포스터였다. 당시에 한창 유행이었는데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주인공 이승현은 신돌석씨보다 두세 살 아래인 것으로 기억한다. 잘 나가는 하이틴 스타였는데 그 뒤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기 생활을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나온 영화의 포스터를 이곳에서 보니 타임 머신을 타고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좁은 계단을 거쳐서 2층으로 올라가니 작은 강의실 같은 곳이 나왔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 대표가 이곳을 소개했다.



[삽회-백소(白笑)]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노동자가 생활한 쪽방(벌집)을 복원(재현)한 뒤, 찾아온 사람들이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것이란다.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공로를 기념하고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돌석씨로서는 놀라웠다. 2013년에 설립되었다는 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것이 노동자로서 부끄러웠다. 이렇게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변하고 있는데 사실 우리가 그 변화를 새로운 전진을 위한 밑거름으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로공단은 원래 구로구에 속해 있었는데 그 뒤 금천구가 구로구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옛 구로공단 지역이 금천구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이 체험관을 금천구가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대표가 탐방의 안내자를 소개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원인이 된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연행 당시에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계속 노동운동을 하다가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 주민자치운동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난 뒤 그냥 소시민으로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분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주민자치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문득 신돌석씨는 동네에서 주민자치회위원을 하는 왕언니가 생각났다. 70년대 민주노조에서 활동했던 왕언니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동네 여러 가지 일을 솔선수범해서 하다가 주민자치회가 생기자 지원을 하였다. 신돌석씨도 함께 했으나 그만 추첨에서 떨어졌고, 왕언니는 당첨되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안내자도 최근에는 지역주민운동에 힘을 쏟는다고 한다.

동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단 그것을 보았다. 앞 부분은 구로공단의 시작과 역사가 이야기되었다. 산업역군 어쩌구 하는 홍보성 멘트로 나가다가 뒤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벽에 걸어 놓은 사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걸었다. 처음 본 사진은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관광버스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설과 추석 때 회사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노동자들의 고향 근처까지 가게 해주었다는 것을 안내자는 설명했다. 평소에 쉬는 날이 거의 없고 최장 1주에 120시간까지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120시간이라니,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시간이다. 그렇게 되다 보니 노동자들은 설과 추석을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그때마저 못 놀게 하거나 고향에 못 가게 하면 노동자들이 그만둘 태세여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도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치 회사에서 선심 쓰는 듯이 나왔다는 것이다. 신돌석씨도 이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공감이 갔다. 신돌석씨는 1984년 10월에 전기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에 취업을 했는데, 공단에 있는 공장에 들어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전에는 주로 가방공장 등 가내수공업 혹은 공단 외곽에 있는 쇠공장에 다녔었다. 10월에 함께 입사한 사람이 20명 정도 되었다. 총 인원이 200명 정도 되는 공장에서 10% 정도 되는 인원이 그때 입사한 셈이었다. 이듬해 설은 2월이었다. 설을 맞이해서 회사가 꼼수를 부렸다. 설 휴가를 양력설로 하면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3개월 미만 근무로 견습이 되기 때문에 상여금을 안 주어도 되었다. 참으로 얕은 수로 착취를 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법적으로 양력설에 이틀을 쉬었고, 음력설에 하루만 쉬었기 때문에 휴가를 안 준다고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설, 추석 휴가를 준다는 것은 법적인 연휴가 되기 이전에도 불문율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신돌석씨가 일하던 공단은 구로공단보다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고향까지 데려다 주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설인 음력설에 쉬지 않고 가짜 설이라고 생각하는 양력설에 쉰다는 것은 노동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회사측이 관리자를 통해서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자 대체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을 하였다. 그런데 프레스반에서 한 사람이 자기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였다. 충청도 출신인데 평소에도 양반 상놈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반장이 어쩔줄 몰라했다. 그 사람은 신돌석씨보다 세 살 정도 아래였는데 자기네는 차례 지낼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호적에서 지워진다고 하였다. 지금도 그런 집안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신돌석씨가 젊을 때만 해도 그런 집이 적지 않게 있었다. 신돌석씨가 학교 다닐 때는 음력설은 쉬지 않았다. 추석도 하루만 쉬었다. 그나마 음력설에 하루 쉰 것은 전두환 때부터이다. 이승만, 박정희 때는 양력설 쉬라고 음력설에 학교, 공공기관 등이 모두 쉬지 않았지만, 음력설이 진짜 설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음력설이나 추석날에 오전에는 거의 수업을 하지 못했다. 애들이 9시 넘어서나 나오기 시작했다.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공장에서 음력설이라고 놀지 않았다가는 모두 그만둔다고 할 판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설과 추석이 연휴가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민초들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얻은 명절 연휴이다. 아무튼 그때 신돌석씨 공장에서는 결국 그 사람만 설 전날 조퇴해서 가기로 하였다. 그 사람이 공정상 꼭 필요한 일을 하는 기술자인 것은 아니었다. 일을 잘하기는 했지만 프레스공이란 것은 그저 숙련된 기능만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만두려면 그만둬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면 다른 노동자들이 동요할 것이고, 반원을 설득하지 못한 반장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측은, 특히 반장은 기를 쓰고 말리려고 했다. 결국 그런 식으로 타협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삽회-백소(白笑)]

 

사진들을 죽 본 뒤 1층으로 내려가서 기획전시관이란 곳에서 설명을 들었다. 거기서 안내자는 그림과 글씨가 있는 커다란 판을 보면서 당시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노조운동을 지원하는 종교단체, 노동야학, 그리고 현장에 들어온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당시 구로공단의 노조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노조운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거기 쓰여 있었다. 신돌석씨는 나중에 들어서 안 일이지만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노동사목 등 종교단체들의 지원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도시산업선교회는 노조에서는 ‘산선’이라고 줄여서 불렀는데 회사측과 경찰들은 ‘도산’이라고 줄여서 불러가지고 ‘도산(都産)이 들어가면 도산(倒産)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언론이 받아서 대대적으로 떠들어댔다. 서울에서는 당산동에 있던 성문밖교회가 유명했다. 보통 영등포 산선이라고 불렀다. 신돌석씨도 해고된 뒤에 몇 차례 가서 회의도 하고, 교육도 받았던 곳이다. 70년대 말의 노동조합의 투쟁에는 산선의 지원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노동청년회는 70년대 민주노조의 간부들 중 상당수가 이 회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80년대 민주노조에서는 이러한 종교단체의 지원과 활동 이외에 노동야학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안내자도 야학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농촌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등을 나온 노동자들이 공부에 대한 목마름으로 야학을 찾았는데, 처음에는 검정고시 야학이 중심이었으나, 그것의 비현실성 때문에 검정고시가 목표가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와 생활에 관한 문제를 공부하는 노동야학이 다수가 되어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서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는 이른바 위장취업자라고 불리던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로와 인천이 주로 그랬다고 하는데 거기 들어갔던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나중에 정계에도 진출해서 이름만 말해도 다 알 만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위장취업자는 1960년대부터 있었다. 1970년대까지는 아주 은밀하게 주로 기술을 배워서 장기간 공장생활을 할 계획을 세우고 들어갔다고 한다.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 중 하나로 나중에 국회의원, 도지사 등을 했던 사람도 1970년대에 공장에 은밀히 들어가서 노조지부장까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노동운동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돌석씨 지역에도 와서 이른바 지도를 하였다. 해고된 이후에는 신돌석씨도 그 사람을 여러 차례 만났다. 그가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해대기 시작할 때 정말 신돌석씨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안내자는 그를 거론하면서 지금은 맛탱이가 갔다고 표현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 출신들의 공장 취업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학생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학생운동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존재이전’ 또는 ‘투신’ 등으로 불렀다. 대부분 이전처럼 장기간 계획을 세워서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팀을 만들어서 현장에 들어갔고, 들어가서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학연이나 지연 혹은 함께 징역을 살았던 인연 등에 의해 조직이 되는 폐단도 있었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지역에는 구로나 인천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수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 그들이 해고되면서 밝혀졌다. 신돌석씨는 공장에서 조철구라는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를 만나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물론 그를 안 만났다고 해서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신돌석씨의 성격이나 출신 배경 등을 볼 때 언젠가는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조건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는 여러 가지 우연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조철구와 만난 것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신돌석씨가 한참 세월이 흐른 뒤 했던 생각이다.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