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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산선

[기독공보]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외침을 교회는 듣고 있는가? (2022.8.9.)

작성일
2022-09-20 13:06
조회
236
[ 연중기획ESG ] 새롭게 이롭게 - S(8)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

 



 

최근 익산 삼일교회(진영훈 목사 시무)의 참새 방앗간은 지역 주민들과 노동자들의 쉼터가 됐다. 지난 7월 20일에는 우체부 아저씨 두 명이 10분 남짓 에어컨이 가동되어 냉난방이 되는 참새방앗간에서 땀을 식히고 생수를 마시고 가는 쉼터의 역할을 했고, 27일 수요일에는 도로공사를 하는 노동자 6명이 소문을 듣고 와서 수돗가에서 장화를 씻고, 화장실을 이용하고, 참새방앗간에서 생수를 챙겼다. 그분들이 교회 앞에서 방황을 하고 있어 건물 어느 곳이든 들어 가서 에어컨 켜고 쉬시라 했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에어컨은 안켜고, 그냥 쉬어 가셨다고 한다. 예배당에 들어가기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참새방앗간을 만들어 쉬게 하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모습이다.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목회를 기도하며 실천한 교회의 시작은 광주의 서림교회였다. 일제의 패전으로 적산공장을 인수 운영하며 관리책임자였던 김형남 장로는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던 1700명의 노동자들을 위해 야간 공민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신앙생활을 통해 정서와 박애를 넓히고자 10여 명의 노동자들과 1946년 2월 10일 둘째 주일 여자기숙사 2층 강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공장교회의 시작이었다. 1948년 6월부터 백리언 목사가 부임하여 6월9일에 전방교회라 칭하고 ,12월에 55평의 예배당을 헌당했다. 또 1949년 10월에 김형남 장로 등 3명이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조직교회가 됐다. 이후 우상필목사, 박봉윤 목사등이 목회하며 1962년 3월 첫 주일 제직회에서 전방교회를 서림교회로 개명하여,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두 회사 노동자들뿐만 아니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로 발전했다. 1967년 2월 증경총회장이었던 장동진 목사가 부임해 목회했고, 매주 월요일이면 3000여 명의 종업원들이 예배했고, 1500여 명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1974년에는 등록교인이 1669명이 됐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구성된 서림교회는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의 사원 사택, 여자기숙사, 남자 기숙사가 심방 장소였고, 전임여전도사가 상주하며 기숙사 예배를 인도했다. 김형남 장로는 총회가 산업전도를 하기로 결정한 1957년에 총회산업전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에 숭전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기독교의 발전에 공헌했다.

 

전방교회와 같이 노동자와 함께하는 교회는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확산 됐다. 1958년 4월 19일 영등포산업전도위원회(위원장:계효언, 부위원장:방지일)가 조직 되는데, 이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에서 파송한 강경구 전도사가 전임 실무자로 일을 하고, 양남동 일대는 영은교회 박조준 목사, 문래동 일대는 영문교회 정영삼 목사, 당산동 일대는 김하정 목사가 각각 구역을 분담해 공장 개척전도에 힘쓰고, 한영방직공장 구내에 한영교회를 설립했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동아염직과 대한모직및 대동모방에서 예배를 드리던 3개의 공장교회가 모여 영은교회를 개척할 때 박조준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는데 도왔고, 영등포산업전도회 전임 목사로 조지송 목사를 영등포지구에 파송했다. 이 때 영등포지역의 공장내 예배와 성경공부는, 지역 목회자들이 각각 맡아 지도했다. 더 나아가 영등포와 시흥지역에서는 시흥교회(차관영 목사), 양평동교회(이정학 목사), 도림교회(유병관 목사)등이, 서울역 인근에서는 용산교회(유호준 목사)가 청계천 주변에서는 연동교회(김형태 목사)와 무학교회(홍성현 목사)가 야학과 교회학교인 산업전도부를 통해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로서 자리매김을 했다. 이와 같이 노동청소년들과 함께 호흡하고 복음의 기쁨을 나누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교회학교의 새로운 접근 방법을 창출 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는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영등포 노동교회에서 성문밖교회로, 1980년대에는 전국 공장지역의 공부방과 어린이집, 노동상담소등을 개설하는 민중교회로 발전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품고, 함께 나누고 섬기는 외국인 노동자 교회와 상담소 및 다문화교회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다가간 교회들의 노력이었다.

최근 들어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문제가 온 사회를 뒤 흔들어 놓았다. 노사간에 타협을 하여 파업이 끝났지만, 정부는 공권력 투입에 의한 강경대응을 천명하여 모든 이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세계경기의 흐름에 따라 2015년 발생한 조선산업의 불황으로 13만 3346명의 하청업체 숙련공들이 2022년 2월 기준 5만 1854명으로 줄어들었다. 7만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떠나게 되었고, 6년전 불황으로 경영이 어렵다며 30%의 임금을 깎아, 남아 있던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은 30% 삭감 되었었다. 지난해 대규모 수주로 호황을 맞고 있지만 인력난을 겪고 있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문제는 다단계 하청구조에 원인이 있다. 국가경쟁력에서 제일을 자랑하는 조선산업은 사내하청이 제일 심한 업종이다. 대우조선해양의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 원청 경영자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협력업체 운영팀을 두어 협력업체 대표들을 내세우고 있다. 흑자경영으로 회복 되었으니 이전 수준으로 원상회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에서 숙련된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도급하청을 주어 협력업체에 하청에 재하청을 주는 식으로 도급단가가 30~40% 낮아지다 보니 하청업체 숙련노동자의 시급이 9200원에 이른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지금처럼 살 순 없지 않습니까?"란 문구가 담긴 플래카드가 걸려 있던 옥포조선소 제1도크 15미터 높이의 농성 현장에는 6명의 노동자들이 처절히 외치고 있었다. 또한 가로세로 1m의 0.3평의 철제구조물에 31일 동안 스스로를 가두었던 유최안 씨는 22년차 용접공인데, 시급 1만 350원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1월 그의 급여명세서에 적힌 실 수령액은 207만 5910원이었다.

파업 내내 30% 임금 인상을 주장했던 것은 애초에 깎인 급여의 원상회복을 주장한 것이었다. 결국 하청업체가 제시한 4.5% 임금인상으로 합의했다. 임금인상 보다는 유최안 씨를 비롯 15m 높이에 농성하는 노동자들의 안전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저수준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이번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농성은 세계 제1위를 자랑하는 조선소 하청 숙련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바로 이들이 거제도에 있는 노동자들이고 세계 최고의 조선산업을 떠 받치고 있는 숙련 노동자들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거제지역을 비롯해 전국의 교회들이 조선산업 하청노동자들의 실상을 조금 더 일찍 알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함께 손잡고 기도 했다면, "여기 사람이 있다"는 음성을 미리 듣고 달려가 부등켜 안아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교회가 닫힌 문을 활짝 열고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부둥켜 안고 해결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노력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바로 우리의 형제 자매요, 이웃이요, 우리가 평안하게 살수 있도록 땀 흘리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 뿐이다.

 

진방주 목사 / 치유목회연구원 원장, 전 총회 국내선교부·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