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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산선

▲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이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옷을 입었다. ⓒ홍인식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산실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이 넉 달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산업선교 역사전시관과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겸하는 건물로 다시 태어났다.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결의로 설립된 영등포산업선교회(총무 손은정 목사)는 78년 해외교회 등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에 회관을 세웠다. 수없는 세월을 견뎌온 낡고 허물어진 곳을 43년 만에 새로운 옷을 입혀준 것이다. 이를 기념해 11월 11일 오후 3시부터 영등포산업선교회관 3층에서 영등포산업선교회관 리모델링, 영등포산업선교회 역사관과 영등포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 개관 축하예식이 진행되었다. 이날 축하예식은 제1부 감사예식, 제2부 축하마당, 제3부 커팅식과 건축 공간 라운딩의 순서로 이어졌다. 1부 감사예배는 정명철 목사(영등포산업선교위원회 위원장)의 인도로 시작되었다. 황진웅 장로(영등포산업선교 위원회 회계, 재건축위원회 총무)와 신승원 목사(일하는 예수회 회장, 영등포산업선교회 전 총무)의 중보기도, 정광숙 집사(다람지회 실장)의 성경봉독(레위기 2장 1~2절)과 성문밖교회 교인과 기독여민회원들의 “우리가 새 날을 낳으리라”의 찬양의 순서가 있었다. 손달익 목사(대한예수교 장로회 전 총회장)는 “향기로운 소제물처럼”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하여 “영등포산업선교회 건물이 처음 지어진 40년을 훨씬 넘어 이제 리모델링을 통하여 역사적인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길로 헌신해 오신 많은 분들께 다시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감격해 했다. “암울한 시대에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역사의 희망의 소리와 같았고 어둡고 힘든 시대를 비추었던 밝은 주님의 빛과도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계속해서 “완전한 자기희생이 번제와 소제의 기본 성격인데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영등포산업선교회를 통해 일했던 많은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 눈물을 기억하고 고난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서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고 이룰 수 없었던 일들을 위해서 뿌려진 많은 분들의 땅과 눈물과 피와 수고가 주님 앞에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와 소제가 되었으며 이제 이런 좋은 희생의 전통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설교 말미에서 손 목사는 “앞으로도 영등포산업선교회가 한국 사회는 물론 전 세계를 향하여 더 강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 존재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희생했던 분들의 정신과 기도로 밤을 세웠던 선배들의 신앙과 경건한 삶으로 사치와 향락과 부패를 멀리했던 선배들의 뒤를 잘 따르는 새로운 결단을 하기”를 당부했다. ▲ 새로운 영등포산업선교회관에는 노동자종합지원센터도 자리잡게 되어 교회와 정부의 협력 모델을 만들어갈 수...
2021.11.16
[짬]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손은정 목사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를 두번째 맡고 있는 손은정 목사. 사진 조현 기자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과 과로, 인권탄압에 시달리던 1960~80년대 노동자들에게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는 그 이름 만으로 산소나 다름없었다. 산업화 시대 가장 밑바닥에서 외마디 비명이나마 지를 수 있었던 노동자들의 성소가 깨끗하게 재단장됐다. ‘산선’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아낸 역사관과 노동자종합지원센터를 갖춘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이 오는 11일 오후 3시 개관 축하 예식을 한다. 지난 8일 서울 당산동의 회관에서 ‘산선’의 총무 손은정(51]) 목사를 만났다. 1958년 방직·제과공장 밀집한 영등포농촌서 떠밀려온 도시노동자 보듬어1979년 옮겨온 당산동 건물 새단장11일 ‘영등포산업선교회관’ 개관 예식 1999년부터 실무자…2번째 총무 맡아“소외된 이들과 함께 치유하는 공간” 11월 11일 새로 개관하는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의 지하에 자리한 역사관의 전경. 사진 조현 기자 “수십 년 만에 회관에 오신 분들은 ‘여기가 이렇게 작았냐’며 믿기지 않아 해요. 요새는 150명만 모이면 꽉 차거든요. 그런데 1980년대엔 대지 200평에 세워진 각층 60평의 이 좁은 건물에 2천명이나 들어찼다고 해요. 그만큼 노동자들로 늘 북적였다는 것이지요.” 손 목사는 예수교장로회통합교단에서 1958년 방직·제과 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영등포에 자리를 잡은 ‘산선’의 특별한 역사를 회고했다. “제1대 총무인 조지송 목사님이 가난한 농어촌으로 내려가려다 ‘이제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어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니 도시산업 노동자들을 돌보는 게 더 시급하다’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헨리 존스 목사의 말을 듣고 바로 이곳에서 산선을 시작했어요. 50대 들어 건강 악화로 1985년 청주로 내려갈 때까지 초석을 놓은 선구자였어요. 지금 봐도 경탄할 정도로 철저히 훈련 프로그램을 짜 실행했죠.” ‘1. 노동자의 언어로 말하고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 2. 예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노동자 이야기를 하라. 3. 책상에 앉아 있지 말고 거리에 나서라. 4. 머리로 일하지 말고 몸으로 일하라. 5. 교회가 원하는 것보다 노동자가 원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라. 6. 노동자의 고통을 머리로 분석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라….’ 훈련원장이던 조 목사에 의해 만들어진 실무자 훈련지침에 따라, 3대 총무를 지낸 이근복(한국기독교목회자지원네트워크 원장) 목사와 5대 총무를 한 뒤 농촌 목회 중인 손은하 목사가 1984년 1기로 공장에 들어갔다. 이후 현장훈련 전통이 뿌리내렸다. 손 목사도 장신대를 졸업한 1999년 현장훈련을 위해 서울 면목동의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6개월간 하루 10~11시간씩 같은 동작만...
2021.11.16
[370호 커버스토리] 노숙인 자활·자립 사회적협동조합 노느매기 박상호 이사장 이름도 모르고 지내던 노숙 유경험자들이, 협동조합 교육을 받으며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고 자립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다. 이는 서울 영등포구 마을기업인 사회적협동조합 ‘노느매기’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노느매기는 2013년 주거 취약계층 자립과 자활을 위해 창립된 조직이다. 2018년 별세한 고(故) 김건호 목사 주도로 설립되었다. 현재 노느매기 이사장은 박상호 씨다. ‘하나를 여러 몫으로 나누는 일’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노느매기라는 말처럼, 여러 사람의 몫을 구하고 돌볼 방법을 찾는 게 그의 일이다. 협동조합이 출범한 지 8년이 되면서 눈에 보이는 성과들도 있지만, 그는 노느매기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늘 고민한다. ‘여러 사람’이라는 단위 자체가 성립하기 힘든 이 시기에, 협동조합의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아는 박상호 이사장을 만나 마을 공동체가 그리는 돌봄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기만 했던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쌍방향의 복지가 필요하고, 이것이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8월 5일 '당산골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 노느매기의 사무실 '공간 1616'에서 진행되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이번 커버스토리 주제가 ‘돌봄’이다. 그동안 다양한 돌봄 영역을 경험해보셨을 것 같은데. 오랫동안 사회복지사로 노숙인 임시 보호시설에서 일했다. 복지사로 일하면서 많은 ‘노숙인’ ‘쪽방촌’ 사람들을 만났고, 이들에게 어떤 돌봄이 필요한지 고민해왔다. 지금은 경제적 취약계층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협동하는 마을기업인 노느매기에서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을과 지역 안에서 필요한 돌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노느매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노숙인 임시보호센터 햇살보금자리(이하 ‘햇살’)에 있으면서 무연고자 장례를 접할 일이 종종 있었다. 햇살에 머물던 선생님(센터에서는 센터 이용자들을 선생님으로 부른다 - 편집자 주)이 무연고 장례자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슬픈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더 슬픈 일이다. 노숙인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그냥 옆에 자리를 펴고 자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지는 거다. 김건호 목사님은 그걸 ‘증발’이라 표현했다. 햇살에서 현실을 목격한 김 목사님은 선생님들과 간담회를 열기 시작했다. 시설을 이용하는 이들이 원하는 걸 물어보면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떠올렸다. 무료로 배식하고 임시로 숙소를 제공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 필요한 건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2021.09.27
▲ 노동훈련 최동빈 수료생(사진 가운데)과 김주역 수료생(사진 오른쪽). 노동훈련 1기 수료생인 이근복 목사와 손은정 목사가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홍인식 ‘일하는 예수회’와 ‘조지송 목사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주관한 기독청년노동훈련 수료 감사예배와 보고대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도농사회처 후원으로 7월6일 총회100주년기념관 제2 연수실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노동훈련 수료 감사예배와 보고회는 김주역·최동빈 등 2명의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생이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의 기간 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진행한 노동훈련에 참가해 수료한 것을 기념해 열린 것이다. 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훈련은 2002년을 끝으로 약 18년 동안 중단되었지만 이번 두 신학생의 수료로 거의 20년만에 재개되는 민중교회 노동훈련으로 산업선교회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20년만에 다시 배출한 노동훈련 수료생 수료 감사예배는 김희룡 목사(성문밖 교회 담임)의 인도로 시작되었다. 최동빈 수료생은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노동을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간다.”며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을 살피고 돌보는 일에 힘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어 김주역 수료생도 “노동의 귀함과 사람의 소중함을 몸으로 배웠으니 절대로 잊지 않겠다.”며 “현장에서 배운 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어 이근복 목사(조지송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는 시편 68:19과 시편 126:4-6을 본문으로 “씨 뿌리는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두 수료생을 격려했다. 이 목사는 “이번 신학생 두 분의 노동훈련은 별 것 아닌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참 귀한 사건”이라며 이는 “우리 총회의 산업선교와 사회선교에 희망을 일구는 씨앗인 까닭”이라고 강조했다. “울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거둔다는, 오늘 본문 시인의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고 희망의 메시지가 되길 바란다.”라고 마무리했다. 예배 후 계속된 보고대회에서 오상열 목사(총회 도농사회처 총무)의 인사말, 송기훈 목사(영등포산업선교회) 훈련경과보고, 김주역, 최동빈(장로회신학대학교)훈련생 보고 박세론 총무(장로회청년회전국연합회), 장창원 목사(오산이주민노동자센터), 이상호 학장(한국폴리텍Ⅱ대학)의 격려사가 있었으며 훈련생을 위한 김경태 목사(대구 구민교회, (사)함께하는아시아생명연대 대표)의 장학금 전달식도 있었다. 노동현장의 상황을 직접 경험하며 배웠다 최동빈 수료생은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의 기간 동안 진행된 훈련 기간 동안 일자리를 구하여서 직접 노동을 하고, 노동 그 자체와 노동현장에서 느낀 점들을 정리한 노동훈련 최종 보고서 발표에서 “훈련 기간에 두 종류의 일, 즉 1월말부터 3월 중순까지는 쿠팡이츠 배달 파트너로서 음식 배달을 했고, 3월말부터 6월 말까지는 CJ대한통운에서 택배 분류...
2021.09.27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한국 노동 선교, 민주화 운동의 요람'은 영등포산업선교회(산업선교회·손은정 총무)의 오랜 역사를 설명하는 수식어다. 경공업 산업 단지가 모여 있던 영등포에서 시작해 산업 선교의 기치를 올리며 독재 정권과 싸워 온 산업선교회는 올해로 설립 63주년을 맞았다.   뒤로멈춤앞으로 산업선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 '영등포'는 지역 공단 노동자들을 상징했다. 하지만 지금 영등포 일대의 모습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산업 단지는 이미 수도권 외곽으로 전부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아파트, 대형 상업 시설 등이 메꿨다. 영등포 문래동 일대는 이제 느낌 있는 '맛집' 밀집 구역으로 젊은이들에게 더 유명하다. '산업 선교'의 대상이었던 공단 노동자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산업선교회는 그 자리에서 사역을 이어 왔다. 1970~1980년대 활동의 정점을 찍은 후, IMF 사태 때는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손을 잡았고 이후로도 협동조합 조직, 노동자 심리 상담, 투쟁 현장 탐방 프로그램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해마다 '노동 주일' 예배를 주관하는 것도 산업선교회 역할이었다. 산업선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신정호 총회장)은 4월 넷째 주일을 노동 주일로 지킨다. 주제에 맞게 총회장 목회 서신을 발표하고, 예배 모범 서식도 배포하지만 이를 지키는 교회는 사실 많지 않다. 노동 주일 예배는 산업선교회와 총회 관계자들만 참석하는 연례 '행사'가 됐다. 올해는 조금 달랐다. 산업선교회는 올해 노동 주일을 앞두고 '노동 주일 설교문'과 '노동 주일 성도의 약속 10가지'를 공모했다. 일반 목회자와 교인이 지금 이 시대 노동의 의미를 고민해 보면 좋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일이다. 짧은 준비·홍보 기간에 비해 꽤 많은 이가 지원했다. 당선자들은 자신이 작성한 설교문을 교회 공동체와 함께 나누며 노동 주일의 의미를 되새겼다. 산업선교회는 이번 공모전 기획과 같이 사역 방향의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일단 40년 넘은 건물의 리모델링 사업이 진행 중이다. 리모델링이 완료되면 건물 3~4층에는 영등포구가 운영하는 노동자 종합 지원 센터가 들어오고, 산업선교회 역사 전시관도 들어선다. 과거 산업 선교 활동을 돌아보며 지금 이 시대의 '영등포'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드러내는 작업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산업선교회를 이끄는 총무 손은정 목사는 1999년 신대원을 졸업하고 바로 기독교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공장에서 노동 훈련을 하고, 산업선교회 인턴으로 시작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산업선교회 총무로 활동했다. 손 목사는 "내가 처음 왔을 때도...
2021.09.27
민중신학의 태두 고 서남동 교수님에 의하면 영등포산업선교회(이하 영산)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영산은 1958년에 예장통합 전도부의 결의로 경기노회가 한국 최대의 경공업단지 영등포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선교회입니다. 기업주의 협력을 받은 공장 예배와 평신도노동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산업 전도’를 하다가, 산업사회와 노동자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권익과 주체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산업선교’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으로 붕괴된 농촌에서 상경한 노동자 대부분은 10대들로 변변한 휴일도 없이 저임금과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며 수당과 퇴직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소그룹운동은 ‘공돌이, 공순이’라고 천시당하던 노동자들을 당당하게 했고,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민주화운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소그룹은 교양과 취미활동, 음식만들기 등을 하며 틈틈이 근로기준법 등을 배우는 따스한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영산은 한국노총이 유신체제를 지지하며 노동문제를 외면할 때 노동자들의 보금자리였고, 민주노동운동의 튼실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조지송 목사님과 인명진 목사님의 뛰어난 지도력과 희생, 노동자들과 실무자들의 헌신으로 감리교 인천산업선교회와 쌍벽이 되어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문제를 교회와 사회에 알리는 가교가 되었고 세계교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민중신학자 권진관 교수님(성공회대 명예교수)은 저서 <예수, 민중의 상징. 민중, 예수의 상징>(동연)에서 산업선교가 민중신학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썼습니다. “민중신학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민중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소수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활동이 있었다. 민중신학은 그 실천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태동된 것이다. 그 실천은 산업선교에 종사했던 목회자, 평신도, 그리고 노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여기에 더해서 기독학생들이 동참하였다.”(375쪽) 한편 산업선교는 한국교회의 사회선교를 열었고 교회성장에도 기여하였다고 평가받습니다. 제가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의 교육훈련원장이던 2011년, 목회자모임에 서울대 김병현 교수를 초청하여 한국교회의 신뢰도 문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강연 후 제가 영산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 교수는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자기가 연구해보니,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섬긴 산업선교 등 민중선교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이 토대에서 70-90년대 한국교회가 급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노동운동사에서는 산업선교가 민주노동운동의 그루터기였다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장숙경 박사의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도서출판 선인)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산업선교는 1960-1970년대 한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에 가장 깊게 관여해 큰 영향을 미친 노동운동단체로, 한국 민주노동운동의 시원(始元)을 논한 때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이다. 산업선교는 그동안 개신교의 선교단체였다는 이유로...
2021.09.27
1958년 영등포의 잿빛 하늘아래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등포산업선교회(총무 신승원 목사, 이하 선교회)’라는 명칭을 붙잡고 도시의 언저리로 소외된 삶을 살아가야 했던 공장노동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었다. 이제 그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창립 50년을 맞았다. 노동자들의 안식처 선교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신승원 목사는 “이곳(선교회)이 7~80년대에는 유일하게 숨통을 틀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서 사람들이 한번 모이면 건물을 가득 채웠던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을 기억한다. 선교회는 50주년을 맞아 17살에 처음 선교회에 참여했었던 여성 노동자 두 명의 기념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50살이 넘은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 명은 지금 작은 장갑을 만드는 공장에서, 또 한 명의 노동자는 이랜드 노동자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삶과 이랜드 노조 설립에 참여했던 한 여성 노동자의 33년의 지난 이후의 삶이 영상에 담겼다. 민주노총 지도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기독교인은 이렇게 말한단다. “선교회는 노동자의 안식처라는 기억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뒤로한 발자국 내어 디딛기 선교회는 9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우리 사회의 변화 속에서 노숙인을 위한 사회선교활동과 먹거리 협동운동, 의료생활협동조합 등을 통한 지역사회 공동체를 이끌어 왔다. 현재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은 300여 명, 신용협동조합은 450여 명, 의료생활협동조합은 1000여 명 정도이다. 또 국제 연대를 통해 CCA(아시아기독교협의회)와 아시아 디아코니아 도시농어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 프로그램을 통해 훈련을 받고 자국으로 돌아간 사회선교 활동가는 약 70여 명. 신 총무는 이런 활동 등과 함께 보다 짜임새 있는 생명평화운동을 전개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선교회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인 노동자 지원 운동 역시 비정규직의 어려움 등을 한국교계에 알리고 한국교회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그 역할을 다한다는 생각이다. 바위 위에 이름 새기기 이제 산업선교회는 50주년을 맞아 ‘지역·협동으로 아시아와 연대하라!’를 주제로 행사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11월9일 <산업선교 50주년 희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선교회는 5월 50주년 희년 역사심포지엄을 갖고 ‘산업선교 10년, 침체기였는가? 지평확장기였는가’를 주제로 지난 10년간의 산업선교에 대한 재평가의 시간을 마련했다. 또 10월25일에는 선교회를 거쳐 갔던 선배 목회자들과 형제·자매들을 초청해 회상의 밤을 함께 하고, 1000여 명의 이름을 동판에 새기려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어떤 이들은 산업선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들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21.09.20